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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l 24. 2020

지금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읽고

궁금함의 시작


 스티브 잡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그의 영웅이라 했다. 빌 게이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72쪽 분량 노트인 ‘코덱스 레스터’를 사는데 3080만 달러(약 379억원) 들였다. IT업계의 큰 획을 그은 그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엇을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2011년 출간된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2014년 ‘이노베이터’ 책 서문에 그는 “전기를 쓰는 일로부터 물러나고 싶었다. 전기는 비범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017년 그는 새로운 전기를 출간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월터 아이작슨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떠한 점에 끌려 다시는 쓰지 않겠다던 전기를 다시 쓰게 된 것일까?

    

 얼마전에 읽은 이지성 작가의 ‘에이트’에 언급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공부법’이 궁금했다. 모나리자가 왜 그렇게 높게 평가받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던 나였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총 719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읽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장 환경


 ‘레오나르도 다빈치’ 앞에 붙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화가에서부터 과학자, 공학자, 예술가, 군사 공학자, 수력 공학자, 공연 기획자, 해부학자, 악기 발명가, 연주가, 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왼손잡이 등등. 보통 우리는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천재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타고난 재능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타고난 재능보다도 그가 자라난 환경이 먼저 궁금했다. 그가 천재로 불리우는 위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떠한 환경들이 영향을 미쳤을까?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의 시골 빈치라는 마을에서 레오나르도가 태어났다. 합법적인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최소 5대째 이어져온 집안 전통에 따라 공증인이 되었어야 했다. 공증인이란 상업 계약서, 토지 거래 계약서, 유언장 같은 법률 문서를 라틴어로 작성하고, 거기에 역사적 사례나 문학적 수사를 보태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의 아버지인 피에로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레오나르도를 고전과 인문학을 배울 수 있었던 라틴어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주로 독학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 방식은 주로 관찰과 경험이 기반이었다. 이에 호기심과 어린 시절 이후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연 현상에 계속 놀랄 줄 아는 능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1452년 요하네스 구텐베르그가 출판사를 열어 많은 지식들이 이탈리아어로 대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레오나르도도 그 혜택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는 ‘사생아들의 황금기’라 불릴 만큼 사생아라는 점이 사회적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다.


 열두살 이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살게된다. 그가 태어난 1400년대 피렌체는 창의성을 자극받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피렌체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렌체 대성당이 있었다. 대성당 꼭대기에 세워진 당대 최대 규모의 돔은 예술과 기술 양쪽의 성공을 의미했다. 피렌체의 많은 예술가가 예술가이면서 건축가였습니다. 또한 그곳의 섬유 업계는 기술, 디자인, 화학, 상업을 접목하며 부상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이면서 각기 다른 분야의 아이디어를 융합하는 것이 일상인 환경이었다.


 그리고 당시 피렌체는 정치와 문화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부유한 은행가 가문 메디치가 장악하고 있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또한 화려한 공연 여는 것을 즐겼다. 야외극과 공연에서 레오나르도는 연극의상, 배경, 무대용 기계장치, 특수효과, 장식 수레, 플래카드, 오락 거리 등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였으며, 독특한 상상력 또한 자극받을 수 있었다.


 열네살쯤 아들의 재능을 알고 있던 아버지 피에로는 고객 중 한명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아들이 도제 교육을 받게 해주었다. 정지된 예술 작품에 동작의 섬세함을 표현하는 것은 베로키오의 재능 중 하나였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그 부분을 그림에 적용해 스승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 이 작업실에서 리넨 위에 섬세한 붓질로 흑백을 표현하는 ‘드레이퍼리습작’ 훈련을 하며 윤곽과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그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인 ‘스푸마토 기법’을 개발했다. 1470년대 중반에는 베로키오와의 협업으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그림 가장 왼쪽의 천사를 그렸는데, 이를 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노라 결심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베로키오의 작업실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너무 좋아했던 레오나르도는 도제 교육을 마친 후에도 그 곳에 남아 일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흡수할 젊은 나이에 좋은 스승을 만나 마음껏 미술 작업을 하는 레오나르도의 모습을 상상하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서른살의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이주한다. 밀라노는 스스로 세습 공작 지위를 얻은 군국주의 독재자들의 통치를 받는 도시국가였다. 야심만만했지만 지위에 대한 명분이 약했으므로, 그들의 성은 신하, 예술가, 공연가, 악사, 사냥꾼, 경륜가, 조련사, 기술자 등 가문의 명망과 적법성을 돋보이게 해줄 각종 도우미로 가득했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예술가가 부족했기에 밀라노는 레오나르도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인근에는 파비아에 명문대학이 있었고, 법률, 철학, 의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지식인이 많았다. 레오나르도는 도나토 브라만테와 프란체스코 디조르조와 같은 뛰어난 동료들을 만나 지식을 교류하기도 하고, 협업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시대적으로 볼 때 사생아로 태어난 것조차 창의성을 발휘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공증인이 되었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교황도 예술가를 존중하고, 더 높은 지위를 꿈꾸는 많은 상인 계급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권력에 굴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후원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고,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였다. 또한 훌륭한 스승을 만났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지식을 나누던 동료들이 많았던 것도 그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실력을 키워가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하기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한가지 면만으로 그를 설명한다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앞에서 레오나르도의 성장 환경을 살펴본 것은, 그의 능력만 보려고 하는 오류를 줄여보기 위함이었다. 이 책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도 레오나르도에게 ‘천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를 벼락 맞은 특별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그 가치를 축소시킨다고 얘기했다. 레오나르도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라틴어를 읽거나 복잡한 나눗셈도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냈고, 수세기 동안 화자되는 그림들을 그리는 등 남들은 따라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루어낸 가치만큼의 천재적인 일을 할 수는 없어도, 어쩌면 우리는 그를 이끌었던 상상력과 창의력을 끌어내는 법을 배울수는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처음에 가졌던 궁금증이다. 사실 이 책의 마지막에 ‘레오나르도에게서 배우기’라는 제목으로 20가지 방법이 나온다. 나는 이를 줄여 세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의 생각법을 표현해보았다.


열정적인 호기심


 책을 읽고 호기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지녔던 호기심은 일반적인 호기심에서도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지나치는, 하지만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을 궁금해하였고, 단순히 궁금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궁금함을 풀기 위해 수없이 관찰하고, 실험하였다. 그의 호기심에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자연의 놀라운 모습을 관찰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과 능력은 그의 예술적 표현 능력과 만나 보석 같은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현상들을 주목했다. ‘하늘은 왜 푸른가?’,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리의 눈은 직선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가?’, ‘하품은 무엇인가?’ 등등. 그는 어릴 때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의 이러한 현상들을 궁금해 하였고,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끊임없이 관찰하고, 실험하였다. 그의 노트에는 이런 것도 적혀 있었다. ‘눈을 움직이게 하는 건, 그래서 한 쪽 눈의 움직임이 반대쪽까지 움직이게 하는 건 어떤 신경인가?’, ‘자궁 속에 있는 인간의 시작을 묘사하라.’ 심지어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와 ‘악어의 턱’이나 ‘소의 태반’ 같은 것도 살펴보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는 혀 근육과 턱 근육이 궁금하여 혀 근육이 발달한 딱따구리와, 턱 힘이 센 악어의 근육까지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며, 사는 동안 천천히 이런 궁금증들을 꾸준히 풀어나갔다.


 레오나르도가 곤충이나 동물을 관찰하는 모습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잠자리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눈썰미도 남달랐다. 잠자리를 한참 관찰한 뒤에, ‘잠자리는 네 날개로 하늘을 나는데 두 앞날개가 올라가면 두 뒷날개는 내려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과연 그는 이런 잠자리의 나는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들판에서 잠자리를 관찰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잠자리에 집중하는 레오나르도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새를 관찰할 때도 그냥 하지 않았다. 그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먼저 바람의 움직임을 파악한 다음, 새가 어떻게 날개와 꼬리의 단순한 균형 조절만으로 바람 속에서 움직이는지 설명하라.’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새의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라.’고 썼다. 처음에는 단순히 새를 그리려고 새의 관찰을 시작했지만, 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자 파고들어가는 그의 호기심 깊이 자체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대성당 건축 자문으로 일하던 1489년 봄이었다. 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 공작을 기리는 초대형 기마상 제작을 의뢰받게 된다. 이 때 그는 연구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말을 해부하고, 말의 모든 부위의 치수를 재고, 그의 모든 관찰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심지어 기마상을 만들다 말고 말의 해부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더 청결한 마구간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정리하며 이에 관한 장치를 고안하기까지 했다. 그의 호기심은 하나에 머물지 않고, 나뭇가지처럼 계속 뻗어나갔다.


 그는 빛과 그림자에도 관심이 많았다. 훌륭한 그림의 본질은, 그리고 물체를 삼차원처럼 보이게 만드는 열쇠는, 제대로 표현된 그림자임을 알았다. 그림자에 관한 그의 집요한 연구는 오늘날 1만5천 단어의 글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원본은 아마도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비례 관계에 대한 감각을 이용해, 다양한 각도에서 굴곡진 물체에 비치는 빛의 효과를 계산했다. 그리고 직사광이 물체에 닿아 만들어지는 일차 그림자, 대기를 통해 확산되는 주변광이 만들어내는 이차 그림자, 근처 사물에서 반사된 빛깔이 살짝 섞인 그림자, 다수의 광원이 만들어내는 복합 그림자 등등 여러 가지 그림자에 대한 연구를 글로 남겼다. 반사광에 대한 그의 연구를 읽으면 그의 그림의 그림자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의 과학적 탐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인간의 내적 감정을 움직임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에도 굉장한 열정을 보였다. ‘움직임의 묘사는 반드시 인물의 심리 상태와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레오나르도는 평소에도 노트하나 들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한 해부학적으로 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신경이 뇌와 연결되고 어떤 신경이 척수와 연결되는지, 그 신경이 어떤 근육을 자극하는지, 어떤 얼굴 움직임이 다른 것과 열결되어 있는지 알아야 했다. 뇌를 해부할 때는 심지어 감각 인식, 감정, 동작 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지점을 찾아 내려 했다. 강박 수준으로 치달은 그의 열정은 <모나리자>를 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레오나르도의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하다가 어느새 그 자체를 위한 지식,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에서 비롯된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1489년부터 그의 해부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는 세포, 정맥, 근육, 신경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인체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가 실제로 해부하고 그린 그림들은 정확했고, 아름다웠다.


 그의 해부학 연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20년 뒤인 5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시작하게된다. 집중적인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지던 이 시기 동안, 레오나르도는 240개의 해부도를 그렸고 최소 1만3천 단어에 달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인체의 모든 뼈, 근육, 주요 장기를 글과 그림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이 출간되었더라면 그의 가장 역사적인 과학적 위업으로 자리매김 했을 것이라고 한다. 입의 신경과 근육을 연구한 부분도 매우 놀랍다. ‘입술을 오므리는 근육은 아랫입술 자체를 형성하는 것과 동일한 근육이다. 그 외에는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오게 하는 근육, 벌어지게 하는 근육, 말리게 하는 근육, 쫙 펴지게 하는 근육, 가로로 비틀어지게 하는 근육,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근육이 있다.’ 입술을 움직이는 근육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의 해부학 연구는 그의 삶에서 가장 흥미롭고, 경이롭고, 존경스러운 부분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그 호기심을 풀어나가는 열정과 깊이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문득 쓸데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라며 다그치는 어른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주어진 지식만 열심히 외우는 아이들, 그리고 시험과 입시로 인해 정작 중요한 많은 것들을 놓치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오나르도가 너무 많은 것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 바람에 더 중요한 많은 것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없었다면, 모나리자의 미소도 없었을 것이다.


꾸준한 기록


 오늘날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7200페이지에 달하는 기록과 낙서라고 한다. 현존하는 7200페이지 이상의 노트는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전체 분량의 4분의 1정도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기록에 열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월터 아이작슨이 레오나르도에 대한 전기를 시작한 것은 그의 걸작이 아니라 그의 노트였다고 한다. 그의 노트 내용만 보더라도 한 사람의 호기심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노트에는 수학 계산, 그의 악동 같은 동성 애인, 새, 비행기기, 연극용 소품, 물의 소용돌이, 혈관, 기괴한 얼굴들, 천사, 사이펀, 식물줄기, 톱으로 자른 두개골의 스케치와 화가를 위한 조언, 눈과 광학에 관한 메모, 전쟁 무기, 우화, 수수께끼, 그림에 관한 연구 등이 뒤섞여 있다. 할 일 목록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목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재미있고, 그의 머릿속을 읽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그의 기록 일부를 공유해본다.


 ‘밀라노와 밀라노 교외의 크기를 측정하기’, ‘수학 잘하는 사람을 찾아 삼각형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 작도하는 법 배우기’, ‘포병 잔니노에게 페라라의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물어보기’, ‘베네데토 포르티나리에게 플랑드르 사람들은 어떻게 얼음 위를 걷는지 물어보기’, ‘수력학 전문가를 찾아 랑고바르드족 방식으로 갑문, 운하, 물레방아 수리하는 법 배우기’, ‘프랑스인 전문가 조반니에게 약속받는대로 태양을 측정하는 법 배우기’, ‘거위의 발 관찰하기. 거위 발이 항상 펼쳐져 있거나 오므려져 있다면 거위는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물이 공기보다 밀도가 높고 무거운데, 어째서 공기 중의 새는 물속의 물고기보다 더 민첩하지 않고 그 반대인가?’, ‘매주 토요일, 남자의 나체를 볼 수 있는 목욕탕에 가기’, ‘돼지 허파에 바람을 넣어 너비만 부풀어 오르는지, 너비와 길이가 함께 부풀어 오르는지 관찰하기’,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말하거나 다투거나 웃거나 주먹질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행동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메모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라.’ 등등.


 이런 일부의 내용만 살펴보아도 그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세상 만물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 원리 혹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작성한 연구 주제 목록을 살펴보는 것 또한 매우 흥미롭다.


 ‘눈을 움직이게 하고, 한쪽 눈의 움직임이 반대쪽 눈의 움직임까지 유발하게 하는 것은 어떤 신경인가?’, ‘눈꺼풀이 덮이게 하는 신경’, ‘눈썹이 위로 올라가게 하는 신경’, ‘이를 악문 상태에서 입술이 벌어지게 하는 신경’, ‘입술을 오므리게 하는 신경’, ‘웃음을 유발하는 신경’, ‘놀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신경’, ‘인간이 자궁 안에서 창조되는 최초의 순간을 묘사하고, 왜 팔삭둥이는 생존할 수 없는지 설명하라’, ‘재채기란 무엇인가’, ‘하품이란 무엇인가’, ‘간질’, ‘경련’, ‘마비’, ‘피로’, ‘허기’, ‘수면’, ‘갈증’, ‘관능’, ‘허벅지의 움직임을 촉발하는 신경’, ‘무릎에서 발까지, 발목에서 발가락까지’.


 처음에는 그림과 관련된 인체의 신경과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순수히 궁금한 인체의 현상까지 연구 목록이 확장됩니다. 인체 안에서도 광범위한 그의 호기심의 영역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기록은 놀라움의 연속이며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전해준다.


 그가 작성한 마지막 노트 페이지로 보이는 곳에, 어떠한 내용이 적혀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예상할까? 레오나르도는 밑변 길이가 다른 직각삼각형 네 개를 그려두었다. 각각의 삼각형 안에는 거기에 맞는 직사각형을 그렸고, 직각삼각형의 나머지 면적을 어둡게 표시했다. 그는 이 페이지의 한가운데에 각각의 직사각형을 의미하는 기호가 적힌 표를 그렸고, 그 아래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내려고 하는지 설명은 달았다. 그의 나이 예순일곱이었다.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어 힘든 와중에도 그는 이런 기하학적인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식지 않는 열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와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문장, 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프가 식고 있었으므로’ 였다.


 그의 삶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스스로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지시를 내리던, 그리고 책을 읽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관찰을 하고, 실험을 하고, 알아낸 것을 노트에 끊임없이 그리고, 써가던 그의 삶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완벽함을 추구


 당시 레오나르도를 게으르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제 시간 안에 마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두는 일로 악명이 높았다. <동방박사의 경배>,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 <앙기아리전투> 등은 대표적인 미완성작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가 전부 그렸거나 주도적으로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기껏해야 열다섯점에 불과하다. 레오나르도는 왜 많은 작품들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동방박사의 경배>를 중단한 이유는 ‘그가 상상한 것들을 손을 이용해 완벽한 예술의 경지로 표현하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해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림 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빛과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 그가 그림 속 모든 인물들에 대하여 빛과 감정을 모두 잘 살려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시작할 당시 그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누드로 표현될 수 있는 자세와 제스처로 인체의 각 부위를 잘 배열하기 위해 화가는 힘줄, 뼈, 근육, 인대 등의 해부학을 알아야 한다.’ 결국 그는 1480년경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약 30년 뒤인 1510년 인체 해부를 통해 습득한 해부학적 지식을 그림에 반영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목근육이다. 그는 그 작품을 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30년 넘게 놓지 못하고, 조금씩 고쳐가고 있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은 어린 시절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어느날, 빈치의 소작농이 나무 방패를 가져와 피에로에게 채색해 줄 사람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피에로는 이 방패를 레오나르도에게 주었다. 레오나르도는 입으로 불과 독을 뿜는 무시무시한 용의 이미지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는 현실적 표현을 위해 진짜 도마뱀, 귀뚜라미, 뱀, 나비, 메뚜기, 박쥐의 각 부위를 조립했고, 짐승의 사체 썪는 지독한 냄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에 골몰했다고 한다. 피에로는 언뜻 진짜 괴물처럼 보이는 그 이미지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움추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관찰력과 상상력은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그의 의지와 함께 서서히 빛을 내고 있었다.


 베로키오와 함께 작업하던 시절, 레오나르도는 <도비아와 천사>라는 그림을 함께 작업한다. 이 그림에서 그는 총총거리는 개와 반짝이는 물고기를 그렸다. 반짝이는 생선 비늘은 그가 어떻게 빛이 물체에 닿았다가 다시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지 다 파악하는 듯 하다. 개의 움직임은 경쾌하고 자연스러우며 고불거리는 털의 묘사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미 이때부터 그는 날카로운 자연관찰자였고, 사물을 비추는 빛을 그림으로 전달하는 기술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베로키오와 함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도 그가 그린 부분은 더 완벽해 보인다. 저 멀리 지평선의 옅은 안개부터 천사의 턱 아래 그림자, 예수의 발에 닿는 물에 이르기까지 그는 화가가 관찰 대상을 변형하고 전달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유화물감을 얇게 덧칠해 완성한 반투명하고도 탁월한 묘사, 남다른 관찰력과 상상력을 통해 예술을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끌어 올린 것이다. 이후에 그린 <수태고지>, <성모화>, <지네브라 데벤치> 에서도 빛과 그림자 사용을 통한 삼차원 묘사, 실감나는 인물들의 묘사, 안개가 낀 듯한 대기 원근법 묘사, 관찰과 판타지의 조화, 인물의 감정을 그림에 담으려는 노력들이 그림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윤곽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은 그의 깊은 관찰에 의해 탄생한 표현기법이었다. 그는 실제 사물은 날카로운 윤곽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사물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산물로서 스푸마토 기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세례>에 묘사된 천사의 눈부터 <모나리자>의 미소까지, 연기로 가려진 듯한 흐릿한 가장자리는 현실적이며 판타지적이고, 우리에게 상상의 여지를 허락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모나리자>를 그려나가는 그의 여정을 살펴보면,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있는지 그 경이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레오나르도는 1503년부터 피렌체에서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밀라노로 다시 이주했다 로마로 간 후,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인생의 종착역인 프랑스로 그림을 가져가 1517년까지 붓질을 하고 얇게 색을 덧입혔다. 더 완벽하게 그리고자 계속 다듬고, 손질하며 인간과 자연에 관한 더 깊은 이해를 그림에 반영하고자 했다. 곡면에 닿는 빛, 인간의 안면 해부,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는 기하학적 입면체, 거친 물살의 흐름, 지구와 인체 간의 유사성 등 그가 연구했던 많은 내용들이 그림에 스며들었다. <모나리자>는 그의 경이로운 관찰력을 기반으로 평생 지적 탐구에 몰두한 한 인간의 작품이었다. 55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작품은 역시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모나리자

글을 마치며


 책을 덮고나서 한동안은 ‘내가 도대체 이 책을 왜 읽었을까?’하는 생각에 멈추어 있었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레오나르도의 노트와 그림을 보고, 월터 아이작슨의 설명을 듣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내가, 아니면 우리 아이들을 레오나르도 같은 천재처럼 키우고 싶은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월터 아이작슨의 표현처럼, 나도 그의 삶을 살펴 보면서 레오나르도는 ‘천재’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중도 포기했다. 궁수들이 흙무더기로 만들어버린 기마상 점토 원형, 중간에 포기한 동방박사 그림과 전투 벽화, 한 번도 하늘을 날지 못한 비행 기기, 한 번도 작동되지 못한 탱크, 수로 변경에 실패한 강, 그리고 출간되지 못한 훌륭한 많은 논문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반복적으로 이런 문장을 썼다고 한다. ‘말해봐. 말해봐. 내가 한 가지라도 한 일이 있는지…. 무엇이라도 만들어진 것이 있는지 말해봐.’ 참으로 슬픈 문장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런 문장을 썼다고 하니 수 많은 일들을 마치치 못했던 나를 위로해주는 듯 하다.


 그는 비록 많은 미완성 프로젝트와 그림들을 남겼지만, 그의 삶과 그림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전해준다. 그의 열정적인 호기심은 잠들었던 나의 뇌를 깨우고, 그의 꾸준한 기록들은 쉬고 있던 나의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완벽함의 추구하기 위해 평생을 지니고 다녔던 그림들은 죽기전까지 포기하지 말고 살라며 응원을 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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