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문화론>, 우치다 타츠루
유대인은 나에게 가까운 존재도 먼 존재도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에 성서 속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정작 내 주변엔 유대인이 없다. 항상 들어 왔지만 실체는 없는 존재, 이것이 나의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였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오랜 기간 박해를 당한 끝에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그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17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2%를 차지하지만, 그들은 전체 노벨상 비율의 23%를 차지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너무 똑똑한 방식으로.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관점조차도 어떤 의미에서 '반유대주의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매우 '사악한' 방식으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는 것이 세계의 존속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의 유대인의 역사는 매우 복잡 다난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지켰기에 사회의 보편 질서에 포섭되지 못했다. 사회는 유대인들이 생산수단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고, 따라서 그들은 대부업이나 유통업 등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이 다시 그들에 대한 억압의 이유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특수성, 그들의 '튐'이 그들의 종족성을 만들었고, 결국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는 데까지 이른다.
여기서 그들이 '튄다'라고 보는 주체들은 비유대인들이다. 사르트르는 이 점에서 비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유대인성'을 만들었다고 본다. 반유대주의를 연구한 노먼 콘은 사르트르의 관점에 동의한다. 여기에 더해 콘은 유대인 문제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한다.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욕망이 투사되어 그들을 증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유대인들은 사실은 유대인들을 강렬하게 욕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투사를 가져다 쓴 콘의 관점까지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사르트르의 유대인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인 입장은 유대인과 어떠한 관련도 없는 나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인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유대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적 편견, 선긋기와 관련한 모든 곳에 적용 가능한 명제 아닐까. '장애인이 장애인인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장애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인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성소수자로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