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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석 Sep 06. 2015

배달의 무도, 그리고 한인동포들

광복 후 그들은 일본에서 어떻게 귀환했는가

지난 9월 5일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2편에서는 하하와 유재석이 일본 우토로 마을을 방문한 이야기가 방영됐습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말미 일본이 교토부 우지시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한인 노동자를 강제 징용했는데요. 우토로 마을은 그중 1300여명이 집단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지만, 이들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죠. 현재 동포 2세대를 중심으로 약 180여명의 사람들이 남아 있으나 지난 8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철거 위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이렇듯 재일동포의 많은 숫자는 광복 후 비참한 삶을 이어 왔습니다. 여기서는 떠난 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동포들이 어떻게 1945년 이후 귀국을 해왔는지 8년 전 학사 시절 발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했습니다. 졸필로 작성된 전문에는 일본 외에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의 귀환 현황을 소상히 담고자 했습니다.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일 한인 동포의 귀환


당시 동북아에서 실권을 잡고 있었던 연합국최고사령부(이하 GHQ)와 일본정부와의 연계를 통해 동포들의 귀환 정책이 추진됐다. 이로 인해 물질적,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재일한인의 지위는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해방된 ‘해방인민’이지만, 일본국민이기 때문에 ‘적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일본인’은 아니라 하고 있다. 모호하기 그지없는 규정이다. 여기서 더 살펴야 할 것은 당시 일본에 대한 GHQ의 통치 방식이다.


일본정부는 자신들은 패전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식민지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히가시 쿠니노미야(東久邇官) 내각은 해방을 맞은 재일한인에 대한 신속한 귀환과 구제를 위한 대책보다는 오로지 재일한인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종래의 관리체제를 유지하는 등 관리에만 관심을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음에도 한인 노무자들은 여전히 일본의 밑에서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일본 내 대부분의 탄광은 강제 징용된 한인 노무자들에 의해 유전됐기에, 이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다. 결국 GHQ에 승인을 받아 한인 노무자를 식민지 시기처럼 적극 활용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인이면서 외국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인해 일본국민이기에 일본의 법률에 따라야 하면서, 참정권, 체류권은 외국인으로서 누리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GHQ의 간접통치방식을 적극 이용해 자국 내 한인동포에게 일본인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게 하며, 외국인으로서 추방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의 제한은 모순되지만, 복합적으로 한인동포를 일본 마음대로 사용하게끔 하는 제도적 틀을 만들어서 마음대로 한인을 다스렸다. 이에 대해 어떠한 항의를 해도 개선되지 않는 한인 동포들은 이도저도 아닌 소외된 계층이 됐다.


귀환하고자 했던 한인동포 역시 일본정부와 GHQ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외면당하며, 자력으로 귀환하거나, 위험에 노출된 채로 귀환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일본 정부는 흥생회(興生會)라는 조직을 세워 한인 동포 귀환의 업무를 맡겼다. 


귀환을 희망하는 재일한인은 흥생회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며 흥생회가 이를 정리해 후생성에 보고하면, 후생성은 희망자들을 각 지역별로 종합 정리해 수송을 철도국에 요청하는 구조다. 흥생회는 귀환 한인이 여정 중에 필요한 물품이나 여비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강제연행 노동자들의 귀환수성이 12월 중순 정도에 끝날 예정이므로 이 이후나 돼서야 일반 재일한인의 귀환 수송이 시작될 것이란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일본인은 지방인양원호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반면, 수많은 한인들은 마굿간을 숙소로 생활하면서 질병과 배고픔에 허덕였다. 흥생회 당시 친일 민간단체일 뿐이었으며, 그로인해 여기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설치된 인양민사무소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재외 일본교포들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재일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귀환 항은 밀려드는 재일한인과 들어오는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일본은 일본인만을 챙겼지, 한인동포들은 그대로 방치하거나, 반발할 때 탄압했다. 결국 한인동포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로 광복한 조국을 향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GHQ는 일반 민간인 귀환에 대해 1945년 11월 1일 지령을 발표했다.


1. 모지, 시모노세키, 하카다地區, 오사카, 코베地區, 기타地區 등 일본을 크게 3지역으로 구분하여 이 순서대로 한국인을 귀환시킬 것

2. 이들 각 지구에서는 役員군인을 우선적으로 취급하고 이어 강제연행자, 기타의 순으로 송환시킬 것

3. 引揚民事務所로 옮기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재류 일반한인은 현 주소지에 머무르도록 조치할 것

4. 남아있는 조선인 및 중국인 징용자들은 늦어도 11월 14일까지 매일 1000명씩 출발시킬 것


GHQ는 당시 일본에 있는 한인동포의 대부분을 귀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 같다. 다만, GHQ는 그들이 측정한 150만 명의 재일동포(원래는 200만이 넘으나, 잘못 산정한 것이다)의 급작스러운 이동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경제적 타격을 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GHQ는 한인동포의 귀환에 대해 들고 가는 화폐, 화물에 제한을 걸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945년 9월 22일 태평양사령부지령 SCAPIN 제 44호「金, 銀, 證券 및 金融書 등 諸 證書의 輸出入 統制」를 발표한 후 동년 10월 12일 SCAPIN 제 127호 「遣加指令」, 10월 31일「朝鮮人 歸還者의 所持金品 등 制限에 關한 件」, 1946년 1월 2일 SCAPIN 제 532호「金. 銀, 有價 證券 및 金融上의 諸證書의 輸出入 統制에 關한 遣加指令」등을 발표하여 재일 동포의 외환 및 재산의 반입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軍政廳 財務局은 남한으로 귀환한 동포에게 1,000원에 한하여 日貨를 교환하여 주고, 나머지는 즉석에서 회수한 후 보관증을 발급하였으며, 1946년 3월에는 재산반입 제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日貨預金令을 실시하여 日本銀行券을 소지한 자는 모두 은행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정도 화폐와 화물의 양은 동포들이 조국으로 돌아와도, 조국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 이었다. 이로 인해 귀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생활난이 심각하여 朝鮮으로 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日本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돈이 없어 그것도 불가능할 듯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朝鮮에 오면 처음에는 좋지. 하지만 한 달만 있어보면 너도 알게다. 너의 삶이 거지나 다름없다는 것을.


심지어 초기에 귀환하던 한인동포들은 이러한 무관심 속에 자력으로 귀환하다가 죽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인원수를 훨씬 초과한 통통배를 타고 가다가 해상에서 뒤집혀 죽기 일쑤였으며, 기뢰에 맞아 폭발한 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1946년 6월 5일 극동위원회에서는 북위 38도 이북의 사람들도, 남한으로의 귀환은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이로 인해 북한으로 귀환한 동포들도 있었다.


일본정부는 1947년 1월말, 북한으로의 귀환희망자를 다시 조사했는데, 1946년 3월 18일까지 등록한 수가 9701명이었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훨씬 못 미치는 1413명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실제 귀환한 자는 3월 15일에 233명, 6월 26일에 118명으로 총계 351명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세보에서 출발하여 북한의 흥남으로 갔다.


일제치하 36년 동안 혹사당한 우리의 재일동포들은 해방직후에도 어떠한 보상과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조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조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들이 가지고 온 재산은 생활하기에 너무나도 소규모였기 때문에, 집도 땅도 직업도 없는 채로 그들은 사회의 빈민층을 형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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