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통역을 하나요?

통역, 이거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by 한끗


내 첫 인하우스 통번역 직장은 게임회사였다. 소위 말하는 3N 기업 중 하나였는데 면접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해당 회사의 마케팅 부서는 정말 바쁜 곳이었고, 글로벌 론칭작을 출시할 때는 오리지널 IP홀더인 외국 방송사에게 제시간에 마케팅 소재 허가를 받아 내기 위해서 모두가 정말 바쁘게 일했고, 회의 분위기 역시 꽤나 치열했다.


어쨌든 면접장에서부터 이런 상황을 가정해놓고 몇 가지 통역 테스트를 봤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게, 면접관 중 한 분이 "제가 지금 굉장히 화난 상태고 이게 정말 급한 건이에요. 최대한 진지하고 급하다는 느낌이 나게 이러저러한 내용 다음 주까지 꼭 완료해서 피드백 전달 부탁드린다는 말 최대한 세게! 강하게! 화난 목소리로! 통역해 주세요"라고 했다. 음... 분명 나는 통대에서 통역사는 소통을 원활하게 도우면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어떻게 화를 내면서 통역을 하지?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화를 내야 저 사람이 원하는 분노 레벨에 맞는 거지? 다짜고짜 면접장에서 who the fuxk do you think you are? Get the damn work done by the fuxking end of the week! 이 정도의 고든램지st 분노..? (당연히 아니다. 절대 절대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저런 생각이 총알처럼 머리에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저 듣기엔 평범한 내용을 최대한 정색하며 말했다. 다행히 내 인상이 그렇게 청순가련한 스타일이 아니어서, 이 정도면 그들 입장에서 충분히 화나 보였는지 나는 합격을 하였고, 출근 첫날 대망의 통역을 들어가게 되었다.



상황은 이랬다. 당시 우리 게임의 IP홀더가 워너브라더스였기 때문에 론칭 트레일러, 키 비주얼 등의 마케팅 소재와, 릴리즈 시점을 비롯한 모든 내용들이 워너에서 추구하는 게임의 브랜드 이미지와 맞는지 피드백을 받고 일을 진행했어야 했다. 문제가 있었던 부분은 게임 트레일러 공개 시점과 관련해 유튜브에 전 권역 한꺼번에 동시에 릴리즈가 되게끔 하도록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고 워너 역시 방송사인 HBO에게 해당 상황을 공유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퍼블리셔인 우리 한국 회사 입장에서는, 한국 게이머들에게 가장 피크 시간대인 6-7시경에 유튜브 트레일러를 공개하고 싶어 했고, 다만 그 시간대가 기존에 합의한 시점보다 몇 시간 빠르다는 것이었다.


퍼블리셔인 한국 회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몇 시간 차이이고, 한국 시장만을 고려했을 때 새벽 시간에 유튜브에 공개가 되는 것보다 퇴근 시점에 터뜨리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을 해서 이 부분에 대해 워너의 허가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워너 입장에서는 본인들도 HBO에게 공유해 준 내용이 있고, 약속은 약속인데, 한국 측에서 퍼블리셔라는 이유 하에 계속 정해진 내용을 바꾸고자 하는 게 썩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팽팽한 기싸움이 몇 주째 벌어지던 찰나에 귀여운 신입 새내기 통역사인 내가 들어가게 된 거였다. 이런...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공기의 흐름. 냉기. 회의 시작 전 보통 보이곤 하는 머쓱함, 어색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몇 주간의 의견 불일치와 소통 단절이 불러온 파국이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최대한 그 어느 쪽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통역을 하던 나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다. 하필 내가 처음 회의통역에 들어간 그날이 유튜브에 영상 릴리즈를 해야 하기로 한 날이었고, 여전히 시간대에 대해선 합의가 안 된 상황이었다.


실장님이 입을 뗐다. 아직 합의가 안 되긴 했지만 우리는 오늘 영상을 릴리즈 하고 싶다고. 그래야 게이머들 잡을 수 있다고.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톤으로 전달했지만 이러나저러나 워너 측에게는 어떻게든 본인들 고집대로만 하려는 퍼블리셔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그는 굉장한 미국식 sarcasm을 구사했는데 사실 이해를 못 한다 해도 누가 봐도 비아냥거리는 투에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되려 통역까지 해버리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 아닌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돼? 안돼. 돼? 안돼. 몇 번의 핑퐁이 있고 나서 워너 측에서 결국 그래~ 너네 맨날 약속도 안 지키고 맨날 마지막에 말 바꾸고 이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든지 말든지 우리 이제 신경 안 써 마음대로 해- 라고 했고, 실장님이 우리는 약속을 어기려던 게 아니라 상황을 봐 가면서 더 나은 전략을 취하려고 했으니 오해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I didn't mean to break a promise...로 입을 떼자마자 그가 Do it! Do it! Just Do it! Do whatever you want!라고 했고 당연히 나이키의 저스트두잇 같이 긍정 파워 넘치는 두잇은.. 아니라는 걸 모두 알 테다. 어쨌든 그 말을 알아들은 실장님은 오케이!!! 땡큐!!!!!!!!!! (어!! 하라고? 어 그래!! 어 고맙다 할게!!!) 라고 외쳤고 분위기는 극한으로 치닫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날 출근 첫날이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입사하자마자 퇴사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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