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쓰기 위한 용기를 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써야지, 글로 써 내려가며 finding my closure 해야지 하면서도, 지난 날을 돌아보고, 그 상황 속의 나를 끄집어내서 그 감정 그대로 마주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진심까지 파헤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쓰기야 쓴다면 못 할 것도 없다지만 또 그러고 싶진 않았다. 글은 나의 진심이자, 성찰이자, 사유니까.
그래도 “써 내려간다는 것”의 힘을 믿기로 했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이 키보드를 타고 나와 연결되고, 정리되고, 해소되고, 치유되는 그 해우소 같은 느낌을 나는 알고, 자잘한 상처들과 고뇌 속에서 차분히 정리되는 기적을 몇 번 맛보았기에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용기라는 것을 끄집어 내보기로 했다.
그와 나는 회계법인 사내 인턴으로 만났다. 당시 나는 통번역 대학원 재학 중이었고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실전 경험을 쌓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통번역 인턴직에 막 지원하던 참이었다. 여의도와 강남에 있는 법인 중 고민하다 집 가까운 여의도를 골랐다.
그는 나보다 한 달 정도 뒤에 들어왔다. 번역 포지션은 아니었는데, 담당 회계사 선생님이 같은 감사본부 인턴사원이니 친하게 지내라고 소개해주고 자리도 가까운 곳에 배치하셨다.
솔직히 첫인상은 별로였다. 왁스로 한껏 넘긴 머리, 검은색 뿔테 안경, 버버리 코트와 목도리. 한껏 깔롱 부린 티가 너무 났다.
게다가 점심시간에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전날밤 한숨도 못 자 멍한 상태여서 그랬던 것이라고 했다.
한 가지 알아낸 게 있다면 나와 동갑이란 점이었다. 나는 대학원 때문에, 그는 회계사 시험 때문에 둘 다 인턴 치고는 조금 많은 나이였다.
돌이켜보면 그 나이도 너무 어리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동갑내기를 만나게 되어 좋긴 한데, 말고는 접점이 없어서 가까워질 계기도 딱히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한 달 먼저 들어온 만큼 다른 여자인턴 쌤이 더 친하고 편해서 굳이 친해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업무를 내가 돕게 될 일이 생겼다. 원래 나의 업무는 감사 시즌 동안 글로벌 지부에 보낼 감사보고서를 영문화하는 것이었는데 번역해야 하는 보고서가 슬슬 마무리되면서 감사 업무 지원에도 배정된 것이었다.
알리오(경영정보 공개시스템)에서 기업 재무제표를 보고 외부감사 대상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라 그에게 설명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친절하고, 자기가 아는 부분에 대해 얘기할 땐 말도 곧잘 하고, 무엇보다 어딘가 여유로운 모습에 살짝 마음이 기울었다. 후에 얘기해 보니 그때를 기점으로 그도 나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음을 느끼고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로 우리는 서로에게 은근한 호감이 있음을 눈치채고, 각자의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입력이 된다.
언젠가 한번, 그의 생일을 듣고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인턴 동기들과 같이 회의실에서 이야기하던 중 내가 그의 애플워치를 차 본다고 가져갔다가 비밀번호를 풀어버린 게 기억난다. 재미 삼아 생일을 입력해 본 거였는데 비번이 풀릴 줄이야. 내가 관심이 있단 걸 모두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조금 더 저돌적이었다. 집 가는 버스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든가, 다 같이 밥 먹으러 걸어가는 길에 몰래 손을 잡는다든가, 회의실에서 한 여자 인턴쌤이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내가 귀엽다고 하니 메신저로 “전 쌤이 더 귀여워요”라고 한다든가…
인생에 두 번 없을 도파민 터지는 인턴 생활이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