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거지같았던 직전의 연애를 끝마치고 남은 대학원 기간 동안은 절대, 절대로 누구를 만나지 않고 졸업이라는 목표만 이루겠다고 선언을 하고 다녔었다. 그리고 내 일, 내 커리어에 몰입하며 되게 불도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그는 나의 꿈에 대해 물어봐 주었고, 대화를 하면서 나도 내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서 참 좋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마음을 열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즈음, 인턴 생활 마무리가 가까워졌다.
마지막 출근일.
그는 내 굿바이 회식 일정표를 짜 인턴쌤들과 회계사쌤들에게 메일을 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당돌한 인턴이 회식 일정표를 짜서 부서 사람들에게 보낼까 싶기도 하고, 그냥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나한테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다.
굿바이 회식의 첫 번째 일정은 다 같이 영화관에 가는 거였다. 슬램덩크가 개봉한 추운 겨울날이었다. 다들 코트며 패딩이며 꽁꽁 싸매고 오들오들 떨며 영화관에 들어갔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무릎 위로 덮고 영화를 보던 중, 팔 받침대 밑으로 무언가가 꼼지락꼼지락 하더니 그의 손이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하트 모양을 그렸다.
영화관이 어두우니까 모든 신경을 촉각에 곤두세워 서로 별 시답잖은 것을 그리고, 속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끝나 있었다.
영화관에서 나와 다 같이 밥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인생네컷도 찍고 데이트인지 회식인지 모를 일정이 끝난 뒤 다들 택시로, 지하철로, 버스로 향했다. 나는 집이 가까워서 걸어갈 참이었는데, 그가 데려다줘도 되냐고 묻길래 좋다고 했다.
집에 걸어가는 길은 전혀 멀지도, 춥지도 않았다. 시공간에 마치 우리 둘만 오려낸 것처럼 붕 떠있는 상태로,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나는 조심스럽게 바라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서로 진작 확인했고, 남은 건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앞으로의 방향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나누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보내야 하는 두 학기가 남아있었고, 나는 대학원 2학년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에게는 학기 마무리와 영국 회계사 시험, 나에게는 통번역 대학원 졸업이라는 중대한 마일스톤이 서로의 앞에 놓여있었다.
시험준비와 롱디라는 장벽이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괜찮았다. 오히려 나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내가 정한 목표가 있기에, 그걸 1순위로 두면서 연애도 잘해보자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 모든 현실의 조건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그가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 중국 롱디이자, 수험생 커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