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저는 아닙니다
나는 소위 말해 ‘한 끗’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 한 끗이라는 건 한 사람의 깊은 생각과 고찰에서 나오는 깊고 예술적인 본인만의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취향, 말투, 글에서 묻어 나온다. 오랫동안 그런 사람들을 동경해 왔다.
내면의 고찰에서 시작해 심연까지 내려가는 사람들. 예로 들자면 한강 작가, 가수 이찬혁, 그리고 주변에 있는 누가 봐도 예술가스러운 친구들. 같은 걸 보고, 만지고, 느껴도 그걸 말이나 글로 풀어내는 세심함은 깊이가 다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뇌가 그렇게 설계된 것 같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사유하는 그런 뇌로. 그래서 더 깊게 내려다보는 사람들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을 갖는다.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와, 신기하다! 좋겠다! (때로는 편하겠다!)라고 하지만 딱히 부러운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만의 세계가 확고히 있는, 색채가 뚜렷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정신적으로 안정적인지 불안정한 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동경의 마음이 움트곤 한다. 내가 본 바로, 대부분의 경우 심연까지 끌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우울하다. 역설적으로 그들 내면의 깊은 우울과 불안이, 그들을 가장 빛내 주는 작품을 짓게 하고, 가장 찐-한 향기와 색채를 남겨준다.
나의 경우는 다르다. 깊은 생각과 고찰에 빠져도 그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느끼고 예민하고 아름답게 풀어내는 재주는 없다. 지금 쓰는 이 문장 자체도 그들이라면 더욱 미감 넘치게 완성할 텐데 이 생각이 ‘나’를 찾아온 이상 이 이상은 무리다. 나는 분석을 한다. 이 감정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느끼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내 에너지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뭐 이런…
즉, 우리는 같은 바다에 있다. 내가 추앙하는 예술가들은 물속을 본다. 더 깊이 잠수한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 쏟아지는 저 햇빛을 본다. 나는 심연을 볼 수 없다. 왜냐면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같은 바다에 있지만, 지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본질적으로 낙관적이다. 물론 나의 낙관주의는 매사에 긍정적인 그런 낙천적임과는 거리가 있다. 고양이 같다고나 할까. 불쑥 왔다가 또 몇 시간씩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가 이 공간에 있음을 알고, 또 그래서 언젠간 돌아오리라 기대하며 산다. 이 희망 때문에 심연을 파고드는 글을 못 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