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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Sep 10. 2020

돌로미티에서 부르는 정선 아리랑

#12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돌로미티의 아리랑과 우리 아리랑..!!


지난 여정


우리는 지난달 8월 8일부터 8월 28일까지 이탈리아 남부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까지 19박 20일의 여정으로 꽤 긴 여행을 다녀왔다. 초행길의 알삐 여행은 피서를 겸했으며, 우리가 돌로미티에 머무는 동안 기온은 섭씨 최하 6도씨부터 최고 18도씨를 기록하며 봄가을의 선선한 날씨 혹은 초겨울의 날씨까지 분포 하고 있었다. 산중의 이른 아침은 초겨울 같았으며 한낮의 기온은 봄가을 날씨를 쏙 빼닮았다. 따라서 여행을 끝마치는 동안 전혀 여름을 느끼지 못하고 귀가한 것이다. 



여행기를 시작할 때 우리의 동선을 기록해 두었는데 대략 4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이었다. 생전 이런 운전 기록은 처음이었다.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까지 이어지는 왕복 1900킬로미터를 제외하면 돌로미티에서만 대략 2천 여 킬로미터를 운전하게 된 것이다. 꼬불꼬불한 산길과 고갯길을 운전하는 동안 상대 차량의 곡예운전 때문에 아찔한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무사히 귀가해 브런치에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알삐의 작은 도시에 처음 들렀던 곳은 꼬르띠나 담뻬쬬라는 곳으로 돌로미티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주변은 온통 빼어난 산들로 병풍처럼 두른 곳. 우리는 그곳에서 빠쏘 디 라바제로 이동한 후 처녀 트래킹을 하고 저녁 늦게 빠쏘 가르데나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 열어보고 있는 브런치의 풍경들은 가르데나 고갯길의 풍경으로 돌로미티에는 이런 고갯길이 빼곡하게 널려있었다. 



산이 있는 곳은 어디든 길이 연결되어 있고 로지와 휴게소 및 스키장과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승강기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돌로미티에서 승강기가 보이는 곳은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고 있었으며, 트래킹족과 바이크족들이 쉼 없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하니와 나는 라바제 고갯길에서 트래킹을 한 후 다시 이곳 가르데나 고갯길 곁에 위치한 트래킹 길을 답사한 후 곧 장도에 오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하 펼쳐지는 풍광들은 답사길에 만난 풍경들로 우리나라의 민요 아리랑을 절로 연상케 했다. 자전거 바이크족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고갯길 정상을 향해 페달을 밟았으며, 오토바이 바이크족들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을 내며 고갯길을 질주하곤 했다. 


안구정화가 절로 되는 위 자료사진 우측 중간쯤 도로 가장자리 맨 앞쪽에 주차해둔 차량이 우리의 애마.. ^^


또 하루 종일 캠핑차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다녔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알삐의 산골짜기는 도회지를 방불케 하는 것. 하지만 광활하고 거대한 산들은 이들의 소음 전부를 흡수하며 평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답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에 한 가족을 만나면서 우리나라 아리랑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 현장으로 카메라를 옮겨본다. 



돌로미티에서 부르는 정선 아리랑




꽤 오래전 설악산을 다녀오는 길에 정선에서 동해시로 이어지는 정선군 임계면 백복령 고갯길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꼬불꼬불 이어지던 도로가 돌로미티에서 느껴보는 고갯길과 비슷했던 것 같다. 물론 해발 높이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정선이 지금처럼 개발이 적게 되었고 아우라지까지 옛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또 정선 5일장에 들러 잠시 막걸리로 목을 축이던 추억까지 정선을 방문하면 오지에 가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맘때 흘려듣지 않았던 정선 아리랑의 구슬픈 멜로디의 원천이 어디인지 꽤 궁금하기도 했다. 


돌로미티 빠쏘 가르데나 트래킹 답사는 이곳까지 이어지고 다시 돌아섰다.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가사와 멜로디도 지방에 따라 서로 달라 아리랑의 어원이 아디서부터 비롯됐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리된 게 없었다. 돌로미티 여행기를 끼적거리는 지금 다시 자료를 뒤적거려 봐도 아리랑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정선군청에서 정리해 둔 정선 아리랑을 살펴보면서 아리랑의 어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돌로미티가 거든 나의 생각이다. 먼저 정선 아리랑(긴 아리랑)의 가사와 함께 링크된 자료의 아리랑을 들어보시기 바란다.(흠.. 물론 안 열어보시겠지요.ㅜ) 이랬다.



정선아리랑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유영란)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김길자)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다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저건 너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해 묵네 
오라버니 장가는 명년에나 가시고
검둥 송아지 툭툭 팔아서 날 시집보내 주 
요 보소 당신아 요 내 얼굴을 좀 보소
포근 폭신 곱던 얼굴이 절골이 되었네 
천리로구나 만리로구나 수천 리로구나
곁에 두고 말못하니는 수천 리로구나
당신이 날 생각을 날만 침만 한다면
가시밭길 수천 리라도 신발 벗고 가리다
우리가 살면은 한오백년 사나
남 듣기 싫은 소리는 부디 하지 맙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세 

출처: 정선군청 정선 아리랑(긴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세


아리랑 노래 가사를 자세히 뜯어보면 사는 게 살아있는 게 아닐 정도로 힘든 시절이었다. 정선 아리랑의 특색을 살펴보니 이 민요는 오래전부터 아라리로 불리어 왔으며, 그 가락은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민요와 같이 한 가지의 일이나 하나만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대(時代)의 흐름에 따라 인간상을 노래한 것이다. 온갖 세상 이야기 다 늘어놓고 맨 마지막 후렴부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세"라고 했다. 간절히 간절히 원하오니 내가 원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소서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들리는 것. 


하니가 저만치 앞장서 갇는 뒤로 돌로미티의 야생화가 보랏빛으로 배웅하고 있다. 돌로미티를 걷는 동안 이 같은 일은 일상이 됐다. 돌로미티에 가시거덜랑 발아래 낮게 웅크린 요정들을 기억하시라.


지난 과거 100년을 돌이켜 보니 대한민국에 사셨던 우리 선조님들은 아리랑의 가사와 다르지 않았다. 겨우 밥술이나 뜨게 된지가 불과 몇십 년이 안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우리의 정체성과 나라의 모습은 누더기가 되었고, 해방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세월을 군부독재가 차지하며 수탈을 일삼아 온 것. 잠시 문민정부와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수탈의 대명사격인 일제의 앞잡이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엉망진창인 세상이다. 독재정권과 한 패거리였던 떡검과 민중의 곰팡이로 변한 경찰까지 대명천지의 세상에서 발광을 하는 동안 민중의 아리랑은 시름만 깊어갈 게 아닌가. 



내가 만난 돌로미티 아리랑


트래킹 답사를 다녀오면서 뷰파인더가 찾아낸 아름다운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가족이 돌로미티의 가르데나 고갯길을 넘어 초원이 펼쳐진 고갯길 마루 근처에서 소풍을 나와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온 가족이 아리랑 고개를 너머 그들의 유토피아에 도착한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띈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세


이때부터 이들 가족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이분들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돌로미티의 100년 사를 돌아보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 대전에 참여한 병사들이 900만 명이나 목숨을 잃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 동맹끼리의 충돌이었다.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협상국이며,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협상국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



이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오스트리아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가 전사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군의 전서자는 40만 명에 달했다. 대략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우리가 답사를 다녀온 돌로미티의 한 곳에서는 눈사태로 1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1916년 12월 13일, '하얀 금요일'이라고도 알려진 이 날, 만 명이 넘는 병사가 돌로미테 산맥의 눈사태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천하절경의 아름답고 천국으로 불리는 곳에 꽃다운 병사들의 주검과 영혼이 뒤범벅되어있는 것이다. 하니와 트래킹을 떠난 돌로미티의 어느 골짜기에는 에델바이스가 눈처럼 소복이 자생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돌로미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영혼이 에델바이스로 피어났을 것..!".


세상이 아름다운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인 것 같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il 10 Septten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K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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