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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Sep 11. 2020

누가 너더러 들풀이냐고 묻거든

#13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누군들 제자식 예쁘지 않겠는가..?!!


하니와 함께 가르데나 고갯길 트래킹은 물론 돌로미티 여행 중에 무언의 약속이 있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은 맨땅이라야 했다. 깊은 산중 인적이 드문 곳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에도 야생화들이 빼곡히 형편에 걸맞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트래킹을 하는 오솔길 곁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자칫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 수도 있어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얼마나 힘들게 피었는가.. 


영상, 돌로미티에서 부르는 정선 아리랑





돌로미티에서 자생하는 풀꽃들은 빠르면 5월 늦어도 6월이면 꽃봉오리를 내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봄이 더디오고 가을이 빨리 오는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풀꽃들은 볕이 짧은 골짜기나 그 어디에서도 다투어 꽃잎을 내놓는 것이다. 우리가 돌로미티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8월 중인데 풀꽃들의 자태는 가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이슬을 머금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한낮에는 벌써부터 시들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곧 씨앗을 맺고 동면을 준비하는 과정이랄까.. 힘든 트래킹 중에서 풀꽃들은 동행자가 되고 환영인파가 되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언제 어디를 가드라도 만나게 되는 풀꽃들은 돌로미티의 백미이자 풀꽃을 생략하면 거대한 바위산들은 양념 빠진 근사한 요리나 다름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늦가을에서부터 5월까지 돌로미티의 풍경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돌로미티는 생명력을 잃고 버려진 그저 바위산처럼 다가오는 게 아닌가.. 하찮아 보이는 풀꽃이 돌로미티에 생명의 혼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더 가진 자와 권력을 누리는 자가 있으면 덜 가지거나 가난한 민중들이 빈자와 천한 자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어머님 생전에 당신께서는 "아가야 울로 바라보지 말고 알로만 보고 살아라.."라며 내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를 바라보지 말고 아래를 바라보고 살아라는 당부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 놓고 어머니마저 하늘나라에 계실 때 가끔씩 당신의 말씀을 떠올리면 세상 그 누구보다 현자였고 철학자였으며 생명의 떡이나 다름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거나 비슷한 이유로 언제인가 강원도 화천의 한 공동체 '시골집' 잔치마당에서 만난 故김근태 선생(열린 우리당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은 행사장 맨 앞자리를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할애한 귀한 장면을 목격한 바 있다. 그는 행사장에 초대된 후 마이크로 "이곳에 참석한 여러 높으신 어른들은 날이면 날마다 상석에서 지내지만 이분들은 생전 처음으로 이곳에 앉는다"며 자리를 양보할 것을 제안해 좌중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당신께서는 2011년 12월 30일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로부터 민주주의자, 민주화의 대부, 세계의 양심수 등으로 불린 군사독재정권의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피해자였다. 당신의 삶은 민중들을 향해 있었고 그분들의 존재를 통해 삶의 이유를 찾지 않았던가.. 



세상에는 제자식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남의 자식은 안중에 없는 어미들도 숱하게 봐 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웃에 뒤질세라 제자식만 챙기는 외눈박이를 숱하게 목격하는데 그분들에게 풀꽃을 보여주면 얼마나 하찮게 여길까.. 



밥상 위에 진귀한 요리나 음식이 올라와야 직성이 풀리듯 여행을 떠나도 최고 호텔에서 머물며 맛있는 요리로 배를 불리면 여행의 진면목을 찾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런 배경이 뒤따랐다. 그러나 돌로미티에 발을 디딘 이후에는 어머님의 가르침대로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을 망정 발아래 좋은 것만 취하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로미티의 혼을 불어넣고 있는 야생화들의 삶은, 풀꽃들의 삶은, 이름 모를 꽃들의 삶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고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설적으로 고귀함을 얻으려면 낮은 자세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행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아가야 울로 바라보지 말고 

알로만 보고 살아래이..



답사길에 만난 트래킹 길은 실로 아름다웠다. 발아래로 펼쳐진 길이 주단을 깔아놓은 듯 화려하고.. 그 곁으로 무수한 풀꽃들이 알록달록한 꽃잎을 내놓고 사람들은 그 위를 사뿐히 즈려 밝고 다녔다.



풀꽃들을 위해 사뿐히 즈려밟고 다녀야 하는 곳. 가슴의 두근거림 조차 달래며 발길을 겨야 하는 곳..



천국이 따로 없는 이런 곳에 노모를 모시고 잠시나마 길을 나서면 얼마나 좋을까.. 좋았을까..



바쁘게 산 것도 아니고 큰 일을 한 것도 없는데 부모님께 전화 조차 자주 드리지 못한 게 마냥 후회스러울 뿐이다. 그러하지 않았다면, 어느 봄날 자운영꽃이 흐드러진 벌판에서 등에 업은 어머니의 무게가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을 게 아닌가..



풀꽃들이 어우렁 더우렁 살아가고 있는 나라.. 

돌로미티가 발아래서 눈에 밟히던 그날 밤.. 

돌로미티는 기어코 비를 쏟아내고 말았다. 



"어머니.. 누군가 저더러 들풀이냐고 묻게되면 그렇다고 대답할게요."



잠시 비가 오신 돌로미티의 밤.. 그 빗방울들은 곧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꽃단장이었겠지.. 다음 날 우리는 꿈에도 잊지 못할 트레킹에 나서며 천하절경 위에 서 있었다. 우리가 미처 꿈꾸지 못한 세상을 풀꽃들이 안내를 해 주었으며, 그 위험했던 길을 돌아 다시 쉼터로 돌아올 때까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 귀환한 것이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il 10 Septten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K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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