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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Sep 22. 2020

여인과 야생화

#20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나에게 여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삐쉬아두 빠쏘 가르데나부터 리푸지오 까바싸까지

-Pisciadù (Sella del) dal Passo Gardena per il Rifugio Cavazza


돌로미티 알따 바디아에서 트래킹이 시작된 이후로 발걸음이 바빠졌다. 가르데나 고갯길 마루에서부터 시작된 산행은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초기에 약간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면 그다음부터는 산길이 길게 수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리푸지오 프랑코 까바싸 알 삐쉬아두(Il rifugio Franco Cavazza al Pisciadù)로 불리는 곳으로, 돌로미티 셀라 그룹(Gruppo del Sella)의 로지(피난처)가 위치한 곳이었다. 링크된 자료사진을 보면 거대한 바위산으로 지형이 여간 험악하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봘 바디아(Val Badia)의 시영지로 뜨렌띠노 알또 아디제(Trentino-Alto Adige) 주의 자치주 볼싸노(Provincia autonoma di Bolzano)의 해발 2,585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장차 우리 앞에 나타날 험난한 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는 그저 바위틈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언제 끝날지 모를(?) 트래킹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과 야생화




가르데나 고갯길에서부터 까바싸 알 삐쉬아두 기슭까지는 길의 경사도 무난할 뿐만 아니라 길 옆으로는 야생화들이 지천에 널려있어서 마치 꽃가루를 뿌려둔 듯 기분 좋은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니가 저만치 앞서갈 때면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곤 했다. 



거대한 바위산과 좁은 산길을 걷는 한 여인.. 

나는 무시로 한 여인의 뒷모습에서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여인의 삶을 떠올리곤 했다. 

여자의 일생을 떠올리곤 했다.


도대체 여성의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7남매를 기르셨다. 그 힘든 세월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가락을 닮았었다. 어느 발레리나는 당신이 좋아서 선택한 예술가의 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의 삶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여자의 길이었다. 


돈으로 명예로 그 어떤 권력을 쥐어준다고 해도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최소한 70년대까지 여필종부(女必從夫)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70년대를 못 박아 둔 것은 그때부터 우리네 여성들의 형편에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종가의 맏며느리에 7남매를 둔 어머니의 노릇은 남자들도 힘든 중노동 이상의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아버지께선 스테인리스 그릇이 나오자마자 대를 이어 내려오던 놋기를 모두 스테인리스로 바꾸었을까.. 노랗고 파르스름한 놋기가 엿장수의 리어카에 실려 저만치 사라질 때 철없던 나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 엿장수의 리어카를 보고 또 봤다. 



제사상에 오를 놋기들은 연중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선조님들 때문에(?) 사흘이 멀다 하고 놋기를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은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으로 몰려든 환자들을 돌보는 아버지의 수발까지 덤으로 챙겼으므로, 철이들 때까지 어머니가 편히 쉬시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7남매가 여전히 어머니 젖을 빨고 있었다면 어머니께선 일찌감치 미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힘들다고 군소리 한 번 불평 한마디 한 적도 없으셨다. 그게 당신의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가끔씩 뒤뜰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지(부엌)에서 정화수를 떠다 놓고 아들 딸 잘 되라고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던 어느 날.. 엄마 혹은 어무이로 불리던 엄마에게 처음으로 "어머니~"라 불렀더니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어머니께선 마치 왕비라도 되신 듯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오냐, 고맙구나 아들아"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어머니의 행주치마에 얼굴을 묻었다.





하니의 산행 습관


이탈리아의 돌로미티는 우리가 자주 다녔던 대한민국의 동네뒷산이나 설악산 등 명산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덩치가 크고 작은 것은 차치하더라고 우리가 걷는 산길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우리나라의 명산에도 야생화가 자생하지만 돌로미티만 못했다. 



이곳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풀꽃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 때문에 산행 중 나의 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눈에 띄는 풍경 앞에서는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거나 그 보다 더한 몸동작을 통해서도 뷰파인더에 피사체를 담아내곤 하는 것이다. 하니와 다른 산행 습관이다. 그렇다면 하니는 어떨까..



평생 산행을 통해 다져진 하니의 체력이지만 하니는 가냘프다. 평생 몸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찾아 먹지 않았으면 당신의 운명은 일찌감치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며 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사실이 그랬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 하니가 종갓집의 맏며느리였다면.. 어머니 같은 처지였더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허약했던 하니가 산행을 하면 철인처럼 돌변하는 것이다. 일단 오솔길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하니는 거의 뒤를 보지 않는다. 그냥 앞만 보고 걷는다. 따라서 피사체 때문에 잠시 멈추고 또 멈춘 나 보다 멈춘 시간만큼 저만치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의 걸음은 왜 그렇게 빠른가.."라고 물었을 때 짧게 대답했다.


"난 걸음을 멈추면 그때부터 힘이 들어. 

  무조건 앞만 보고 가야 덜 힘들어..!!"





산행이 시작된 이후로 하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했다. 잠시 앞서 갈 때면 나의 뒤를 따라 걷다가 어느새 다시 나를 추월하여 저만치 앞서가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모습이 좋아졌다. 걸음을 멈추면 더 힘들다는 표현을 하나둘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종갓집의 맏며느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자 사람은 태생적으로 체력에 부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자 사람과 전혀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 여자 사들이 양성평등을 외치기 전에 남자 사람들이 세심히 돌아봐야 할 일이다. 오죽하면 조물주가 여자 사람을 맨 나중에 만들었을까..



 말 수가 적고.. 생각이 깊고 다른 하니는 돌로미티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베토벤의 비창(悲愴)을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그런 잠시 후, 코를 푸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안다. 베토벤이 그녀를 울린 것이다. 당신의 취미는 클래식 음악 듣기와 그림 그리기, 산행이 전부나 다름없다. 당신이 힘들고 외로울 때 돌로미티의 거대한 바위산처럼 당신을 보듬고 지켜준 것들.. 


그리고 "왜 울었는지.."라고 묻기도 전에 "음악 때문에 가슴이 마구 꿈틀대잖아. 나.. 감동받았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음악 감상으로부터 시작된 습관이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흠.. 돌로미티에서 만난 야생화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때문일 거라 굳게 믿는 거야.. 씩~^^)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il 22 Septten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K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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