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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Sep 30. 2020

이탈리아서 담아본 머루주

-추석 명절에 맛 본 음복주(飮福酒)의 추억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추석 명절의 추억을 손꼽아 보니..!   


   우리 집은 종가이다. 나는 인동 장씨(仁同 張氏) 가문의 태산 경공파 38대 손이며 종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이 계시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두고 있다. 모두 7남매의 집안이다. 직계 선조님은 희빈 장씨로 널리 알려진 장희빈(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과 그녀의 오라버니 장희제가 있다. 


두 분은 22대손이며 장희빈(張玉貞)의 아버지 장형(경종의 외할아버지)은 장옥정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 따라서 장옥정과 장희제 일가를 거두어준 분(후견인)이 5촌 당숙(장옥정 아버지의 사촌 형)인 장현이었다. 1617년 역관에 수석 합격한 당신께선 효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역관(譯官)으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장옥정의 오라버니 장희제는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났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 씨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內禁衛_임금을 호위하던 군대)에 재직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장희빈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추석 명절이나 설날이 되면 아버지와 숙부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듣게 됐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차례를 지내고 음복주(飮福酒)를 나누며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흥미도 있었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을 때면 "명절에 무슨 이야기가 맨날 똑같은지.." 나중에는 흘려듣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씩 철이 들어가면서 어른들의 말씀이 추모의 정이 담긴 후손들의 도리 같은 것이라는데 급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 때부터 철이 들 때까지 곁에서 떠나지 않은 음복주는 추모의 정을 보다 더 두텁게 해 주었다. 추석과 설날 양대 명절 외에도 우리 집은 잊을만하면 선조님들의 제사가 있었으므로, 큰 방 아랫목에는 술 빚는 항아리가 군용 담요를 두르고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처럼 방 반쪽 구석을 늘 차지하고 있었다. 


종가의 맏며느리이신 어머니께선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까맣고 하얀 치마저고리에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지런히 부엌과 안방을 드나드셨다. 그리고 명절이나 제사 당일이면 말간 청주를 거두어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그 술맛이 어떠할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차례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께서 놋기로 만든 작은 청주 잔에 청주를 한 방울씩 나누어 주시곤 했다. 조상님이 먼저 드시던 술을 나누어 마심으로 일체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맨 처음 받아 든 청주 잔을 입에 대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뱉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그러할 망정 나중에는 누구도 말리지 못할 큰 일로 번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그냥 된 게 아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한 잔 두 잔.. 한 병 두 병.. 한 말 두 말.. 그리고 밤이 하얗게 되도록 지새울 줄 누가 알았는가 말이다. 어느 보름날 귀밝이술 한 모금이 고딩 때가 되자 어머님이 담그신 술독이 바닥이 날 때까지 퍼 마셔도 끄떡없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과정은 따로 있었다. 집안에 손님이 오셔서 막걸리 심부름을 갈 때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빨아먹는 발칙한 일까지 거들었다는 거.. 알랑가 모르겠다. ^^



추석 명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다 보니 부모님은 물론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정을 음복주의 추억에 일면 담아두고 있다. 그리고 사흘 전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의 어느 마을 어귀에서 따 온 머루를 손질하여 머루주를 담아보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주 봐 왔던 머루(Vitis coignetiae)는 원산지가 한국(과 일본)에 서식하는 온대지역 식물이었다. 


주로 1,3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동네 뒷산에서 흔히 만나던 과실수였으며, 우리 선조님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청산별곡(靑山別曲)에 등장하는 식물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산별곡의 작사자는 미상(고려시대)이지만, 운율만으로도 한을 담은 노래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서두에 잠시 끼적거린 집안의 일 조차 지내놓고 보면 청산별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닐까.. 



청산별곡(靑山別曲)

-작자미상(고려가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리얄리 얄랑셩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개사(改詞) 출처: bugs



이탈리아서 담아본 머루주


위에서 만난 자료사진들은 머루의 출처이다. 지난 9월 24일부터 2박 4일간 다녀온 돌로미티 입구의 봘레 디 까도레(Valle di Cadore)의 오래된 역사(Stazione di Cadore) 근처 풀숲에서 따 온 머루. 이날 우리는 이 마을에서 미리 점찍어둔 작은 집 하나를 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발견된 게 머루였으며 전부 다 수확(?)했다면 브런치 이웃 전부를 초대해서 잔치를 벌여도 될만한 양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하고 대략 2킬로그램 정도만 따서 집으로 가져왔는데, 글쎄.. 이게 추석 명절을 추억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오늘 오후(30일, 현지시각) 몇 송이 먹다 남은 달콤한 머루를 짓이겨 머루술을 담가봤다. 



머루의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Antociani)은 노화방지와 시력 개선에 효과가 있고, 머루씨 속에는 비타민 E가 들어 있어 항산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머루술을 포도주와 비교해보면 항암작용을 하는 폴리페놀(Polifenolo)은 포도주보다 2배나 많으며,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o) 성분은 포도주에 비해 5배나 많다는 것. 그리고 포도의 10배에 해당하는 항암성분이 있다고 하므로 기적의 약용식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청산별곡을 지은 민초들은 당신을 스트레스로 내몬 세상을 이기기 위해 머루랑 달래랑 먹고 청산에 살고 싶어 했을까.. 



추석 명절을 앞두고 담은 머루주는 나만의 리체타로 만들었다. 머루 전부를 나무공이로 으깨고 손으로 주물러 즙을 우려낸 다음 채에 걸러 페트병에 담았다. 씨앗을 섞으면 떫떠름한 탄닌 맛이 우러날 것을 우려해 머루 육즙만 짜내 담고 설탕 10% 정도를 가미했다. 육즙이 대략 750그램 정도였으므로 50~70그램의 설탕을 투입하고 바텐더처럼 병을 마구 흔들어 섞었다. 그리고 1차 발효를 위해 랩으로 씌운 다음 포크를 이용해 구멍을 뚫어주었다. 머루와 포도는 발효될 때 숨을 쉰다. 그리고 상온에 보관하고 있는 것. 


만약 한국에서 머루주를 담갔다면 소주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음복주에 단련된 주당의 손에 남아날 것인가..?! 나는 여태껏 내가 담은 술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본 적이 없거니와 친구나 이웃이 담은 술이 있다면 기꺼이 바닥을 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물론 빈손으로 갈 리가 없지..(흐흐 안주는 들고 가야!! ^^)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잘 쇠시기 바라며, 먼 길 오가실 때 운전 조심하시기 바란다. 끝!


Vitis coignetiae da Valle di Cadore_Dolomiti
il 30 Septtem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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