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가 꿈꾸는 그곳 Nov 15. 2020

사랑의 유효기간

#35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사랑은 영원할까.. 영원할 수 있을까..?!!



동서양의 세계관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돌로미티의 리푸지오 삐쉬아두가 연출해 낸 절경은 무릉도원 혹은 천상유희 같은 이상향을 소환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들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얼추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우리는 넋 나간 사람처럼 이리저리 발길을 옮겨가며 돌로미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지난 여정 무릉도원과 천상유희 끄트머리에 이렇게 써 두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비경 가운데 난생처음 만나게 된 돌로미티의 리푸지오 삐쉬아두(Rifugio F. Cavazza al Pisciadù Hütte) 정상에 올라, 까마득한 벼랑 끝에 서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었다. 


거친 듯 모난 데가 없고 빼어난 아름다움이 어느 것 하나 버릴 데 없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도 그랬을까.. 돌로미티의 비경을 앞에 두고 천천히 감상하면서 떠올린 실화를 소환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체온이 얼마까지 유효한지 돌로미티의 아름다움과 견주어 본다.



사랑의 유효기간

-돌로미티 여행기에 부침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한 직후 나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떼 주의 한 리스또란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언짢은 일이 생길까 리스또란떼의 상호는 물론 지역과 셰프의 이름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곳은 미쉘린(Guida Michelin) 별 하나를 단 유명한 리스또란떼였다. 운 좋게도 나는 이곳에서 이탈리아 고급 요리의 기술을 배우게 됐다. 한 분의 요리 대가로부터 철학을 배웠다면 이 리스또란떼의 오너 셰프로부터 요리의 기술 혹은 이탈리아 요리의 진수를 배웠다고나 할까.. 



셰프는 매우 정교하고 빠른 손놀림 등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작품을 완성하곤 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 나의 이탈리아 요리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리스또란떼에서 배려한 모처의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리스또란떼에서 일을 해 보신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알 것이다. 쉬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 두 차례 짧은 휴식이 주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그 시간을 빠우자(Pausa)라고 부른다. 점심 손님이 있거나 저녁 손님이 있을 때 손님이 예약한 요리 준비를 해 놓거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약은 대체로 점심때보다 저녁 손님이 주로 많았다. 



미쉘린 별을 단 이 리스또란떼의 유명세는 손님들이 타고 온 자동차는 물론 예약지에서부터 도드라진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리스또란떼 살롱은 먼지 한 톨 없으며 화려한 듯 준수한 외모를 갖춘 예식장처럼 반듯했다. 모든 기물들은 제자리에 놓여있는가 하면 살롱 벽에는 고풍스러운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모퉁이에는 살롱 분위기에 걸맞은 작은 조각 작품들이 서 있는 우아한 리스또란떼였다. 이곳은 이 지역 언론들이 가끔씩 찾아와 취재를 하곤 했고, 짬이 나면 지역의 여성들을 상대로 요리교실을 열기도 했다. 아무튼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멋진 리스또란떼였으며, 사람들은 미쉘린 셰프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잠시 빠우자를 마치고 리스또란떼에 들렀는데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직원은 물론 셰프와 함께 일하던 요리사가 다른 때와 달리 심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습관처럼 포옹 인사를 건네자 획 돌아섰다. 너무 무안했다. 그때 셰프의 눈을 보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은 부어있었다. 



잠시 후 사정을 알아채면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됐다. 이탈리아 보건 당국으로부터 벌금(multa)을 물게 된 것이다. 자그마치 2,000유로나 됐다. 그렇다면 왜 수백만 원이나 되는 벌금을 물게 된 것일까.. 나는 주인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어느 날 보건 당국이 급습해 식료품 창고에 쌓여있던 식재료의 유효기간을 점검하던 중 유효기간이 지난 식료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셰프도 몰랐고 주인은 더더군다나 몰랐으며, 요리사는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감히 이렇쿵저렇쿵 말을 거들 수 없는 형편에 있는 것이다. 



또 오너 셰프가 주로 관리하는 그 창고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향신료 등이 빼곡하게 잘 정리되어 쌓여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식료품 수는 30%에 미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많은 종류의 식료품 등이 거의 매일 셰프의 손을 통해 손님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벌금을 물게 된 배경에는 수많은 식재료가 제 때 잘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스또란떼에 입고되는 식료품들은 반입될 때 유효기간이 표시된 딱지 혹은 프린트가 되어았지만,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미처 관리가 안 된 것이랄까.. 



그렇다면 벌금은 고사하고  그 많은 식재료를 어떻게 관리한단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미쉘린 별을 단 이 리스또란떼는 벌금을 물게 된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셰프에게 제안한 것이다. 셰프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아왔고 주인은 기쁜 나머지 "Garzie mille(너무 고마워요)..!"를 거듭했다. 이때부터 콧대가 세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한 늦깎이 초보 요리사에 곁을 주기 시작하며 신뢰를 쌓아간 것이다. 



나의 제안은 간단했다. 창고에 쌓인 수많은 식재료 등에 일일이 하나씩 꼬리표를 부여하고, 자주 사용하는 순서대로 다시 정리한 다음, 사용처까지 다시 분류하는 등의 체크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다. 시무룩하던 셰프는 쾌재를 불렀다. 이날부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으로 이틀 동안 리스또란떼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내가 근무한 또 다른 리스또란떼에서는 이런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유효기간이 지나면 제 아무리 싱싱하고 무탈한 식재료라 할지라도 모두 폐기 처분하거나 요리사를 불러 집으로 가져가서 먹게 한다.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이 혹시라도 손님에게 해를 끼칠까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그래야 마땅했다. 


우리네 사랑도 그러할까..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유효기간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 있으며 체크리스트가 필요할까.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사랑타령을 하며 살게 된다. 사랑에 눈먼 사람들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놈의 사랑이라는 게 슬슬 변질되기 시작한다. 



좋을 때는 언제고 살릴 X 죽일 X 하고 싸우다가 마침내 찢어진다. 요즘은 이런 현상이 너무 잦아진 세상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다 키우고 분가까지 한 부부의 사랑은 어떠할까.. 이게 참 재밌다. 사람들은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게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ㅋ 그렇다면 그분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일까. 

사랑에 대해 식료품처럼 유효기간을 매기기란 쉽지 않다. 젊을 때 사랑과 나이가 든 다음의 사랑의 차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장작불 같은 화력을 지닌 사랑이었다면, 나이가 지긋해지면 숯불처럼 지긋한 사랑이 이어지고 있는 것. 

다만, 그 정도는 사람들 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요 인간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 등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가당치 않아 보인다. 그것보다 내 가슴에서 식어있는 감성의 창고를 재점검해 봐야 할 것 같다. 비경을 봐도 감동하지 못하고 아름다움 앞에서 시큰둥하다면.. 그건 분명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책은 없는 것일까.. 



하니는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돌로미티 노란 꽃양귀비처럼 리푸지오 삐쉬아두 정상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 것이다. 생태 한계선을 넘은 정상에 샛노란 꽃양귀비가 납작하게 엎드려 곧 다가올 9월을 맞이하며 우리를 향해 방긋 웃고 있는 것이다. 


메마른 듯 거대한 바위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돌로미티에 생명을 더해주는 심장 같은 존재랄까. 저만치 앞서 나와 동고동락한 한 여자 사람이 지나간다. 그녀는 한 남자 사람의 삶에 존재감과 활력소를 퍼붓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사람.. 그녀의 뒷모습에 꼬리표를 달아주며 이렇게 적는다. 


1. 첫눈에 반한 사람 2. 사랑에 빠뜨린 사람 3. 동고동락한 사람 4. 죽을 때까지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 5. 매일 보고 싶은 사람.. (흠..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적고 보니 오그라든다. ^^)  그렇지만 사랑은 고백할 때마다 오그라드는 것! 천만번 고백해도 싫지 않은 말이자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려가는 한 방법이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2020
il 14 Novem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매거진의 이전글 무릉도원과 천상유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