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열어본 남도 여행(상편)
기적은 이런 것일까...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해남 땅을 주유하면서 잠시 정자 아래서 망중한을 달래고 있었다. 정자는 작은 숲 곁에서 가늘게 몇 방울씩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파릇한 작은 숲에도 하루 종일 봄비가 깃들고 있었다. 하늘도 우중충 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날 정자 속은 뽀송뽀송 말라있었다.
가끔 자동차들이 한 대씩 지나치는 것 외 사방이 침묵에 빠져든 곳이었다. 촉촉이 젖은 작은 숲 아래로 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고, 이곳이 영흥 천변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완도 청해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우리는 영흥 천변의 작은 숲 옆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숲 속에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정자 아래서 본 작은 숲이 호기심을 부르며 우산을 펼쳐 들게 됐다. 천천히 숲을 한 번 돌아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다가서기도 전부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동백꽃이었다.
새빨간 동백꽃들이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숲으로 다가서자 아이들처럼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감추기 시작한다. 이방인의 출현에 적당히 경계하는 모습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기적 같은 일이 작은 숲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있었다. (기록, 2014년 3월 1일)
서기 2021년 2월 12일 이른 새벽(현지시각) 한국에 가 있는 하니로부터 전화(메신저)가 왔다. 그곳은 설날 새벽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했다. 미주알고주알 통화가 길어졌다. 곁에 있으면 말 수가 적은 그녀는 전화만 붙들면 놔주지 않는다. 메신저 창에 기록된 통화 시간은 1시간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삶에 중요한 일 가운데 그림 수업과 주거문제를 여전히 화제로 삼았다. 여전히 코로나가 문제였다. 한국과 이탈리아를 이어주는 항공편이 원활해야 당신의 꿈은 물론 우리들의 인생 후반전이 활기를 띌 것이다. 그러나 설날에 열어본 이탈리아의 코로나 성적표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암울한 상태이다.
이대로 가다간 3월을 훌쩍 넘길 태세이므로 하늘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가 없다. 짐작컨대 빨라야 4월에서 5월 중이 아닐까 미리 점쳐본다. 그녀의 마음은 저만치 앞서있다. 이미 이탈리아에 도착해 그림 수업을 하고 있는 듯 마음이 조급한 것이다. 그러면서 말은 하지 않아도 코로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돌로미티에서 만난 추억을 한동안 나누었다. 장소를 말하면 단박에 떠올리는 돌로미티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아예 돌로미티로 둥지를 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되려면 그림 수업을 일찍 끝내야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까지 거리는 1300킬로미터.. 이렇게 먼 거리를 오가며 그림 수업을 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랐다. 돌로미티 여행의 적기는 6월부터이므로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돌로미티 여행을 포기하면 모를까..
그녀가 5월 중에 이탈리아 땅을 다시 밟는다면 수업 일수 때문에 돌로미티행은 포기해야 한다. 그곳은 6월부터 최소한 9월까지가 적기였으므로 선택에 필요한 것이다. 만약 코로나가 다시 말썽을 부리면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도피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림 수업만으로도 벅찬 일정이 우리 앞에 놓인 것이다. 만에 하나 코로나가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된다면.. 백신을 맞고 코로나에 대항할 수만 있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있다. 돌로미티를 다녀온 후에 수업을 재개하고 바를레타에 살면 될 것이다.
이 모든 건 우리의 계획 속에 있지만 사노라면 그게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 결정은 늘 하늘의 몫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행운이 따라준다면 가능할 것이다. 설날 아침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통화를 마쳤다.
서기 2021년 2월 12일 이른 새벽(현지시간),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설날 아침을 맞이했다. 설날 아침이면 잘 고아낸 육수로 만들어낸 떡국을 먹으며 지난 한 해의 액운을 떨쳐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떡국을 만들 가래떡을 찾아볼 수가 없다. 먼 나라에 살고 있으면 명절 때의 추억이 그리운 법이다. 만약 떡국 한 그릇이라도 있었으면 그녀와 통화는 길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견우와 직녀처럼 사이좋게(?) 멀어져 있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사진첩을 열어 완도 여행에서 만난 동백꽃 무리를 만났다. 포스트에 등장한 동백꽃들은 완도의 영흥 천변에 피어난 꽃들이다. 비에 젖어야 아름다운 꽃들.. 서울에서 강진으로 다시 해남 땅을 가로질러 완도에 들어가 신지도 곳곳을 돌아 나오면서 우연찮게 만난 풍경들 이이다. 그때 단상을 이렇게 남겼다.
아가야 너는 내 맘 알까
아가야 너는 내 맘 알까
너를 사랑하여 먼 길 떠난
그 맘 네가 알까
아가야 너는 내 맘 알까
너를 그리워하며 길 떠난
그 맘 네가 알까
춘삼월 봄비 오시면
아가들 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아가야 그 맘 네가 알까
-영흥천 동백숲에서
표지 사진에 등장한 사진은 그녀가 수채화로 남긴 작품의 배경이다. 작품은 아들내미가 싼값에 사들였다. 그녀의 혼이 담긴 작품이 어느 날 새끼에게 팔린 것이다. 그냥 가져가라고 했더니 금 일봉을 담아 건네드리는 것. 희한한 일이지.. 동백꽃은 왜 비에 젖어야 더 아름다운지..!
Bellissimi fiori quando sono bagnati sotto la pioggia
il 12 Febbr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