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울에 봄이 오시던 날
지난 여정(봄처녀 이렇게 오신다) 중에서
서울에 3월이 오시면 아침부터 바빠진다. 악천후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빠짐없아 다니던 산행 시간이 빨라지는 것이다. 해돋이가 시작되기 전에 아침운동을 떠나는 것이다. 따끈한 커피를 포트에 담고 과일 한 두 조각과 떠 한 두쪽이면 준비가 끝난다. 내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들려있다. 특히 이맘때가 되면 봄처녀를 마중 나가야 했으므로, 그녀와 함께 걷는 산길은 아이들처럼 마냥 설레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계절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자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발버둥 치며 거부해도 봄은 어느덧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입춘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절기상 입춘이라면 봄의 문턱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봄이 저만치 달아날 때 그제야 '이제 봄이 왔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얼마나 느려 터졌는지 모른다. 하니는 이런 현상을 '게을러터졌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 옛날..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 등을 통해 깨달은 현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랄까.. 그렇다고 옛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우주관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스(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세계관은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모습이다. 자기 땅에 말뚝(?)을 박아 놓고 저 멀리 지중해까지 원을 그린 다음 지구의 모습을 그려냈으니 말이다.
그게 기원전의 일이거나 그 먼저 선사시대 이전에 일어났다고 해도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니까 대략 수 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오늘날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무식해 보였겠는가마는 그들은 그들대로 행복했을 것이다. 오늘날은 허블 우주 망원경이나 보이저호 로켓이 우주를 관찰하고 태양계 너머까지 넘보고 있으니 천체물리학자 및 과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이룬 업적에 대해 우쭐댈만하다. 어깨를 으쓱해 보일만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만물의 영장'인지 모른다. 그들이 일하는 연구소의 책상 위에서 살고 있는 화초에 대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다. 설령 눈치를 주었을 망정 하찮은 정도 이상 흔해빠진 식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곁에서 늘 봐 왔던 생물이다. 그 화초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이상으로 망원경으로 관찰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랄까..
인간 세상에서 평범해 보이는 것들은 그렇게 눈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사계절의 현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사계절이 인간계 혹은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식물은 적당한 볕과 수분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건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나의 주변에서 만났던 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 사람들에게 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이치.. 혹은 지난겨울에 대출한 은행빚이 봄이 오시면 무조건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한 현상일까.. 봄이 오시면 시집 장가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려 있을까.. 봄이 오시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꿈에 부풀려 있을까.. 봄이 오시면 그동안 꿈꾸던 캠퍼스에 발을 디딜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 봄이 오시면 근사한 옷을 입고 데이트에 나설 꿈에 부풀려 있을까.. 봄이 오시면 코로나 시대가 끝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여행을 떠날 꿈에 부풀려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하니가 불렀던 '봄날이 간다'를 흥얼거리던 때를 생각할까.. 봄이 오시면 곗돈 탈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는 것일까.. 등등
봄이 오시면 하고 싶은 일들이 밤하늘의 별만큼 빼곡하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아홉 개의 행성을 거느린 태양 별처럼 모두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발현되는 현상들이자, 남의 형편이나 사정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곗돈을 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서는 본체만체하는 것이랄까.. 이런 현상들 때문에 시중에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 바이러스처럼 찬바람이 뒹구는 골목길을 떠돌아다닌다.
봄처녀와 전혀 무관할 듯한 내로남불 현상은 먼 데서 나타난 게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대모산에서 일어났다. 무심한 사람들 곁에서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며 마침내 새싹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들은 겨우내 혹한의 추위를 이겨냈으며, 아무도 봐주지 않은 산중에서 차디찬 겨울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다. 가끔씩 겨울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며 골수를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단단한 껍질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참고 또 참은 결과 하늘은 입춘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런 아픔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차라리 죽었으면 싶은 고통의 시간에 태연한 표정의 이웃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싶은 것.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들만이 희로애락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로남불의 극치가 인간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입춘이 오시면 걸음이 바빠지고 동선이 넓어진다. 내가 찍고 있는 발도장 곁에는 무수한 영혼들이 뷰파인더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탈리아어로 새싹은 제르몰리오(Germoglio)라 부른다. 그런 한편 씨앗 속에 숨겨진 새싹의 근원을 아니마(Anima)라 부른다. 아니마란 '영혼'을 뜻하는 것으로 새싹의 영혼에서 비롯된 게 새싹이자, 입춘 이후에 내놓는 자연의 한 현상인 것이다. 이들은 장차 나무의 나이테를 늘리는가 하면 열매와 씨앗을 맺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봄처녀 제 오실 때 가슴이 마구 설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우리 행성에서 함께 살아왔으며 앞으로 동행해야 할 친구들이 이맘때 주변에 널려있는 것이다. 내가 동선을 늘리고 바빠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세계는 괄목할만하다. 그러나 세상을 관조하는 법이나 우주에 접근하는 과학의 잣대를 버리면 보다 큰 우주를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인간의 잣대로 도무지 불가능한 몇백 광년 혹은 몇천 광년 몇 백억 광년.. 그리고 태양계의 별이 수억 수천만 개가 더 널린 우주를 세고 세다가 또 세다가 잠이 드는 연구소의 사람들을 다독거려 잠자리를 옮길 때가 된 거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혹은 태양계가 누군가의 어항이라면 생각이 달라질까..
날파리가 쥐고 있는 줄자로 이탈리아에서 서울까지 거리를 잰다면 책상 위에 머리 박고 졸고 있는 사람의 처지와 별로 다를 바 없겠지..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어린왕자가 가지고 노는 작은 어항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최근이자 입춘 때 나타난 봄처녀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가끔씩 어항에 물을 주기도 하고 작은 입술로 호~하며 입김을 불기도 한다. 그가 생떽쥐페리를 만나기 위해 사하라 사막으로 떠났을 때 어항 속은 밤이슬에 젖기도 하고 볕에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봄처녀는 마냥 행복해할 것이다. 내가 겨울부터 입춘까지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지..
"...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해. 그러다가 4시가 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을 느끼게 돼.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될 거란 말이야. 그러나 만일,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지금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가시고 나면(슬픔은 가시는 거니까) 넌 언제까지나 내 동무로 있을 거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 질 거야."
Ecco come arriva la primavera_il Monte DEMO, Seoul COREA
il 15 Febbr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