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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an 04. 2022

나목(裸木)과 새 한 마리

#15 엘 찰텐, 라구나 또레 가는 길


세상에 의미 없는 것도 있을까..?!



한 때 우리는 이곳에 머리를 뉘고 싶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청정지역.. 그곳에 머리를 뉘면 신의 그림자를 이불 삼아 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라를 가슴에 품고 싶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라고 했었지..



그 소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 수업이 바를레타에서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잠시 파타고니아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조물주의 또 다른 작품.. 그곳이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돌로미티였다. 그리고 이틀 전 그녀가 말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기록은 언제쯤 완성될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 사진첩을 열어보니 맑고 고우며 향기로운 나라의 풍경이 빼곡하다. 저 멀리 라구나 또레로 흐르는 빙하가 느낌표를 연출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라.. 



 



나목(裸木)과 새 한 마리


    서기 2022년 1월 3일 늦은 저녁(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노트북을 켜고 사진첩을 열었다. 그곳은 우리가 사랑했던 파타고니아의 라구나 또레(Laguna Torre)로 가는 길.. 돌이켜 생각해 보니 까마득하다. 여행기를 끼적거리기 조금 전, 하니와 나는 이곳 파타고니아(아르헨티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녀는 "까마득하다"며 당시를 술회했다. 그래 봤자 10년 전후의 일이었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니 기적 같은 일이 우리 곁에서 일어난 것이다.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는 설명이 필요했을까.. 그녀와 나눈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가 끼어들었다. 우리네 삶에 프란체스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기 직전 나의 이탈리아 이름은 프란체스코였다. 



교대에 위치한 한 어학당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담임 선생님이 이탈리아 이름 하나를 고르라고 헸다. 이때까지 민 해도 이탈리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름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내게 A4 용지 하나를 건넸다. 



그곳에는 이탈리아 남자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그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다. 나는 아주 잠시 머뭇거린 다음 "프란체스코요.."라며 말했다. 용지를 건네받는 즉시 프란체스코의 이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와 나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청년기의 나는 <성 프란체스코>라는 책 한 권 때문에 책상 앞에서 펑펑 소리 죽여 운 적이 있다. 무슨 눈물이 밑도 끝도 없이 흘러 책을 흥건히 적실 정도였다. 나는 어느덧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되어있었다. 책을 통해 당신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공감을 하며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랄까..



성자들의 삶이 주로 그러하듯 당신이 고난의 길을 택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신은 요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른바 '금수저' 이상의 보석 수저 같은 귀족 집안의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가출을 시도하고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당신이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오상(五傷, 성흔)의 흔적은 나중의 일이었다. 오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생전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었던 상처가 나타나는 초자연적인(超自然的)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초자연적 현상.. 사람들은 성흔(聖痕)에 대해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초자연적 현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위키백과는 이렇게 말한다.


초자연적 현상(超自然的現象)은 자연에 부여되어 있는 것, 즉 외부의 자연계나 인간에게 흔히 갖춰지고 있는 지력(知力) 이외의 것, 이러한 뜻에서 자연을 초월해 나온 것을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인간 자신에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명소 엘 찰텐(El Chalten)의 숙소에서 라구나 또레로 트래킹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위성으로 확인되는 GPS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설령 있었다고 한들 우리 몫이 될 수 없었다. 그때 만난 풍경들이 <엘 찰텐, 라구나 또레 가는 길>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눈 대화 속에는 우리의 파타고니아 여행 이야기기 등장했으며, 그 가운데 우연과 필연이 끼어든 것이랄까..



그래서 내가 꺼내 든 카드(?)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였다. 그다음 파타고니아 야행을 끝마치고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는 과정에 등장한 이탈리아 이름과 함께 이탈리아서 요리 공부를 하고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던 퓌렌쩨에 소원을 이루게 됐다. 그다음 현재 살고 있는 바를레타로 다시 둥지를 옮기게 된 것이며 일주일에 세 차례 퓌렌쩨서 만난 루이지(그림 선생님)로부터 그림 수업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 그냥 일상이자 하나의 인생일 뿐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면 놀라운 일이 생기게 된다. 이런 과정은 처음부터 우리가 계획했던 사실이 아니었다.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앃인 결과물일 뿐이었다. 설령 우리가 계획한 목적이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건 필연에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세상의 기적 혹은 초자연적 현상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지불식간에 지나친 일들을 정리해 본다면 생존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매일 만나는 부모 형제자매는 물론 친구와 이웃까지.. 당신의 주변을 스쳐간 인연들이 그저 된 게 하나도 없는 기적깉은 일인 것이다. 



우리가 라구나 또레로 이동하는 동안 나무에 앉아 생각에 젖어있는 새 한 마리를 뷰파인더에 담았다. 인연법에 따르면 보통 이상의 인연이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냥 새대가리처럼 생각하면 새대가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아시시의 성자처럼 생각하면, 오상 이상의 성흔이 뷰파인더에 묻어나는 것이다. 



세상 만물에는 조물주가 그러했듯이 의미를 부여하면 그 즉시 새로운 생명 혹은 기적이 일어나는 법이 아닐까.. 임인년 새해 맑고 향기로운 땅을 여행했던 사실만으로 우리는 하늘의 은총을 입은 행운아였다. 그 질긴 인연의 끈이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루이지 화실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곁에서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계속>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_LAGUNA TORRE PATAGONIA ARGENTINA
il 03 Gennai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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