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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an 30. 2022

피렌체 수도원과 장미의 이름 III

--나와 형제자매와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우리는 시방 무엇을 해야 할까..?!!



    피렌체 수도원은 그저 상징적일 뿐 포스트 내용과 (직접적으로) 무관하다. 수도원 이야기를 다룬 <장미의 이름>의 줄거리에 따르면 폐쇄된 공간에 살고 있던 수도사들이 어느 날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한다. 겉으로는 그들이 수도원의 교리와 규칙 등을 어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꼬락서니였다.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자기 검열을 하며 나쁜 세상 나쁜 수도원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원과 자기 잇속 밖에 모르는 정치검찰 혹은 사법부와 정치판 혹은 개판.. 묘한 시기에 열어본 피렌체 수도원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이 처한 '위험한 기회'를 목도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어느 날 마주친 정치검찰에 이길 방법은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이웃 혹은 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데는 선수이자 법치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 당신의 소중한 한 표가 나라의 일꾼을 뽑는 위대한 절차가 될 것이다. 


나라가 시끄러울수록.. 몇몇 녀석들이 나대며 여러분들을 힘들게 할수록 물러서면 안 된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투표이다. 잠시 피렌체 수도원과 장미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현주소 일부분을 돌아봤다. 아직 투표일이 꽤나 남았으며 다음 주면 후보 등록이 시작된다. 그때까지 나의 판단을 도울 짝퉁 후보를 샅샅이 뒤져봐야겠다. 재밌는 절차이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흘 전 <피렌체 수도원과 장미의 이름 II>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다시 이어서 쓴다.



    서기 2022년 1월 30일 아침(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간밤에 꿈을 꾸고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인덕션 위에 물을 끓이고 커피 한 잔을 준비했다. 하니는 잠시 뒤척이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하고 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의 기도는 산만했다. 누군가 집중을 방해했으며 방해는 계속 이어졌다.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 봤다. 반드시 문제점이 있을 것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이 앞선 나머지 자꾸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산만했다. 



평소 감동적이었던 하늘을 향한 기도는 엉망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기도의 순서도 내용도 생각이 나지 않거나 중언부언이 이어졌다. 점점 더 조바심만 더해갔다. 아마도 한국에서 개신교회를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이 같은 상황이 어떤지 단박에 알 것이다. 초신자들이 겪는 일이자 내가 겪어본 경험이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긴가.. 


나는 물론 형제자매와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해 본 지 꽤 오래됐다. 그저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기도.. 그 기도를 통성으로 하려니 잠시 후에 다시 중언부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게 무슨 일인가..?"하고 생각하던 중에, 나의 생각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흉악한 사건들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흉악한 사건이란 누가 무슨 중한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오래전에 통독을 한 성경책 속에서 감동적인 장면 몇이떠올랐다. 오늘날 이집트 그러니까 에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출애굽을 하는 장면이다. 에굽에서 탈출을 하는 장면을 서술해 둔 출애굽기의 저자는 모세이다. 기록 시기는 (B.C.) 1446년~1406년경으로, 기록 목적은 야훼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사건을 보여 주고, 그들이 하나의 국가로서 차츰 정비되고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오래전 출애굽기를 통독하던 시기 나는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출애굽기 1장에 그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야곱 일행이 애굽으로 이주한 지 대략 350년이 흐른 때,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번성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애굽 왕 바로는 가혹한 탄압 정책을 펼친다. 



이때 하늘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기적을 베푸신다. 이들을 위해 예비한 지도자가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모세.. 그는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핍박받던 시절, 나일 강에서 건져 올린 한 히브리 사내아이가 바로 공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가 장차 이스라엘을 탈출시킬 모세였다. 장성한 모세는 못된 짓을 일삼는 한 애굽인을 죽인 후 미디안 땅으로 도피하여 40년을 보낸다. 그리고 야훼께서 모세를 불러 능력을 부어주신다. 


모세가 형 아론과 함께 에굽으로 다시 돌아가 바로 왕에게 해방(출애굽)을 요구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이스라엘을 핍박을 더 받게 된다. 그때 야훼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을 보여주며 재차 출애굽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때부터 에굽왕에게 '애굽 신'들이 헛됨을 보여주는 이적을 보여주게 된다. 



첫째 재앙: 물이 피가 된다. 둘째 재앙: 개구리가 뭍으로 올라온다. 셋째 재앙: 티끌이 이가 된다. 넷째 재앙: 파리가 들끓는다. 다섯째 재앙: 가축의 죽음이 이어진다. 여섯째 재앙: 악성 종기가 생겨난다. 일곱째 재앙: 우박이 내린다. 여덟째 재앙: 메뚜기가 땅을 덮는다. 아홉째 재앙: 흑암이 땅에 있다. 어둠이 땅을 덮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은 모세와 아론의 제안을 거부하자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 시작한다. 최후통첩이 끝나자 애굽의 초태생들이 모두 죽는 열 번째 재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이주한 지 430년 만에 ..마침내 출애굽의 대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의 모습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낯 뜨거운 풍경을 기억해 내며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검찰 공무원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 나라.. 거기에 국민들의 눈높이에도 맞지 않은 사법부의 판단은 물론 정론직필을 해야 할 언론 등이 그들만의 잇속을 챙기며 나라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해 왔던 후손들이거나 정부의 조직이었으며 대략 70년간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군 이른바 기득권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대통령 후보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었으며, 장차 검찰공화국을 꿈꾸고 있는 검찰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작금에는 아예 검찰이 있으나마나한 조직으로 변했고 범죄를 두둔하는 집단이 된 지 꽤 오래였다. 

범죄를 일삼는 검찰 집단과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집단들이 우리나라 최상위 1%를 차지하는 사람들일까.. 이들을 이겨보기 위해 깨어있는 민주 애국 시민들은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고,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으로 다시 정권을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정치검찰과 기득권 세력들이 우리의 생각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나라는 뒷짐을 지고 있고 공정해야 할 선거관리 위원회는 불공정으로 일관하며 검찰 쿠데타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무속인들이 청치 검찰과 힘을 합쳐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어쩌면 잘 어울리지도 않을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극단의 조치인 계엄령(戒嚴令)이었다. 계엄령은 쿠데타, 내전, 반란, 전쟁, 폭동, 국가적 재난 등 초비상 사태로 인해 국가의 일상적인 치안 유지와 사법권 유지가 불가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과 같은 국가 원수 또는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의 동의 아래 군대를 동원하여 치안 및 사법권을 유지하는 조치라고 말하고 있다. 



촛불 혁명 당시 7시간의 베일에 가려있던 박근혜가 만지작거린 카드가 계엄령이라고 한다.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전두환이 저지른 만행이 계엄령이며, 우리나라가 민주국가로 발돋움하기 전에 권력에 눈먼 잡단의 사람들이 집행한 억지논리가 계엄령이었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을 참조하면 다수 정치인들과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 언론 등이 검찰 권력을 무서워하며 방관하고 방치하고 있는 매우 위험한 풍경이다.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는 요건에 쿠데타, 내전, 반란, 국가적 재난이 명시되어 있다. 나라와 국민의 권리를 위해 일해야 할 검찰 공무원 혹은 권력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세탁하려는 의도는 쿠데타와 다름없다는 합리적 판단이 들고, 정부와 국가에 대한 반란이자 폭동이며 국가적 재난이 아니란 말일까.. 



너도 나도 법치를 내세울 때 힘 없이 웅크리고 앉아있던 조치가 계엄령이라는 생각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생각나는 것이다. 잠자리에 일어나기 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초심으로 돌아가 보니 기도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모세와 아론이 출애굽을 시작하기 전까지 참고 또 참으며 능력을 미루어 왔던 야훼의 기적.. 


사람들은 일상의 카테고리 속에 갇혀 민주주의를 잘 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법치주의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법을 집행해야 할 인간이나 집단이 불법을 서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옳을 것이다. 언제인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계엄령 청원을 한적 있다. 사람들은 청와대를 향해 청원을 하고 일정 수에 다다르면 집행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100만 명이 청원에 동참한다고 해도 집행을 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 사회가 에굽에서 편하게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장차 광야 애 서 만나게 될 고난의 시기에 다시 편하게 지내던 노예생활을 꿈꿀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들은 무속인들을 앞세워 지도자에게 대들고 출애굽을 방해할 게 뻔하다. 



야훼가 세운 지도자.. 장차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성막과 법궤를 완성한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시내산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적으로 야훼를 초유로 만났다. 그때 야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첫 언약을 맺은 곳이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바이블의 기록을 외면하며, 무속인들이 벌이는 굿판의 떡고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남들보다 좀 더 가지고 보다 더 누리고 싶은 마음에 신앙인들 조차 흔들리고 있었을까..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이른바 '영적인' 표현이자 오늘날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돈과 권력을 가치로 여기는 이스라엘인이 만든 허상이 출애굽 기애 묻어나는 것이다. 



촛불 혁명이 일으켜 세운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이 처한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잘해오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점들을 방관하면 다시 독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고, 민주당의 게으름이 우리 민족이 두 번 다시 선진국 문턱으로 들어설 수 없는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결심만 남았다. 법으로 할 수 없는 초법적 조치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속인에 놀아나는 윤석열과 김건희 등을 즉각 체포해야 할 때이다. 



아울러 대장동 비리 등으로 얼룩진 국민의 짐을 해산하고 범법자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 범죄자가 백주에 마음대로 싸돌아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은 정부와 법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도원의 내부를 그린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절망한 수도사들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개똥 밭에 굴어도 하늘나라 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점 명심해야 할 때다. 민심은 천심..


하니와 나는 퓌렌쩨 수도원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잠시 후 우리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풍경이 잘 어우러진 언덕 위에 도착했다. 그곳은 한 때 젖과 꿀이 흐르던 동네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보다 나은 마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숲속이었다. 수도원은 사람들이 살기좋은 가장 이상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il Nostro viaggio in Italia con mia moglie_Certosa di Firenze
il 30 Gennai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Certosa di Firenze_Storia(퓌렌쩨 수도원 이야기)


Fu edificata a partire dal 1341 da Niccolò AcciaiuoliGran Siniscalco del Regno di Napoli e membro di una delle più illustri casate fiorentine, ed alla sua morte (1365), l'edificio era quasi completato. La Certosa venne poi ampliata e arricchita da numerose donazioni nel corso dei secoli.

Il nome e la tipologia edilizia derivano dalla Grande Chartreuse, la prima casa dell'ordine dei certosini costruita nel 1084 da San Bruno sul Massiccio della Chartreuse, vicino a Grenoble, e come tutte le certose anche questa è ubicata distante dalla città, in un luogo in origine solitario e silenzioso.

Dopo le soppressioni degli ordini religiosi nel 1810 la Certosa venne spogliata di circa 500 opere d'arte, solo in parte restituite dopo la restituzione ai Certosini e il ritorno dei Lorena (1818). Ad esempio molti degli arredi vennero irrimediabilmente dispersi, così come molti dipinti e sculture. La tavola dell'altare maggiore della chiesa, commissionata dallo stesso Niccolò Acciaiuoli a Gherardo Starnina (Madonna e Santi), è ora divisa fra musei stranieri e collezi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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