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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Nov 07. 2019

쑥부쟁이가 점령한 바람의 땅

#8 아내와 함께한 여행 사진첩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이 그러하다면 당신의 모습을 어디서 찾게 된단 말인가..?!



바람의 땅으로 떠난 사람


세월 참 빠르다. 브런치에 담을 여행 사진을 보는 즉시 K 씨가 떠올랐다.  그를 만난 지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그를 만났다면 지금 우리는 백발이 성성한 이순의 노인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아내와 내가 그를 만난 장소는 남미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땅끝에 위치한 우수아이아(Ushuaia)라는 곳. 


그곳은 오래전 대항해 시대 당시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불의 땅(Tierra del Fuego)으로 불리던 곳이다. 또 종의 기원(L'origine delle specie)을 세상에 내놓은 찰스 다윈과 피츠로이 선장은, 마젤란이 목숨을 걸고 항해에 나서 지름길을 찾아낸 비글해협에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바람의 땅, 그것도 해변에 둥지를 튼 한 나무는 결국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일찌감치 잎을 다 떨구었다.



우리는 15년 전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한 남미 일주 여행을 떠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남미 여행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매일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 되는 시절이랄까. K 씨를 만나게 된 건 우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땅끝 도시까지 진출하여 민박집을 어렵게 구한 직후, 민박집주인이 내게 "한국인이냐"며 묻더니 자기 집에 또 다른 "한국인 두 사람이 묵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지금 어디에 계시냐"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 즉시 그는 두 사람이 비글해협 건너편에 있는 뿌에르또 나바리노(Puerto Navarino)로 갔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귀가하는 대로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해 놓고 우리는 시내 관광에 나섰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니 우리를 쏙 빼닮은 한국인 두 사람이 우리를 맞이한 것. 참 희한한 인연이었다. 




바람에 저항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허리를 더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그 먼 나라 그 먼 땅에서 동족(?)을 만나다니.. 우리는 그때부터 의기투합하여 우수아이아를 떠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사연 등을 듣게 됐다. 요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칠레산 수산물에 대해 익숙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칠레의 수산물을 쉽게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 때 우리나라 남극 탐험대가 있는 세종기지에 식품을 납품한 경력이 있었다. 


이들은 칠레 바닷가 곳곳을 누비며 우리나라에 수출할 어자원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우리 인간들의 지구별 전파 경로가 떠올랐다. 인류의 기원설 등에 따라 아프리카를 출발한 인종 가운데 동북아시아 바이칼 호수를 거쳐 베링해를 건넌 사람들이 다시 아메리카 대륙 끝까지 진출한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우리 형제자매들과 똑같이 생긴 두 사람 때문이었다. 




살을 애는 지독한 쓸쓸함과 외로움이 깃든 바닷가.. 그곳에서 삶을 위한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혹은 쑥부쟁이처럼 바람에 날려 그 먼 곳까지 가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여행 삼아 땅끝까지 가 보았지만 그들은 생존수단을 찾아 그 먼 곳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상봉하게 됐다. 그게 대략 8년 전의 일이며, 그중 한 명은 도봉구에서 살고 있어서 도봉산 등반 전에 반갑게 그를 재회했다. 그리고 그의 일정을 알게 됐는데 다시 칠레로 떠날 것이라 했다. 


당시 우리는 두 번째 남미투어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칠레에 발을 들여놓으면 연락하겠노라며 현지 전화번호 등을 메모해 두었다. 그는 마젤란 해협의 중심 도시 뿐따 아레나스(Punta Arenas)에 현지 여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뿐따 아레나스에 도착해 K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동안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을 재회하는 듯한 설렘이 들었다. 한국에서 만날 때 보다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당신의 존재를 지키는 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전화벨 소리가 뚝 끊기더니 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K 씨의 아내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신분 등을 밝히고 전화를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지금 일 때문에 뿌에르또 나탈레스에 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 보라"며 다른 연락처 하나를 일러주었다. 그는 불의 이자(Tierra del Fuego) 바람의 (Tierra del Vento)으로 떠난 것이다.  




바다는 말이 없고 무시로 바람이 불어닥친다



우리는 뿐따 아레나스에서 잠시 몸을 추스른 후 K 씨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그가 일을 하는 곳이자 장차 우리가 트레킹을 할 피츠로이와 또레스 델 파이네의 배후 도시였기 때문에 겸사겸사 뿐따 아레나스로 이동한 것. 그리고 그를 찾아 나섰다. 뿐따 아레나스에 도착한 직후 맨 먼저 그의 소재 파악을 해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그가 일할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물어보지 않았다. 아내(사진 오른쪽)는 꽃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당시 한국에 수출할 칠레산 곰장어를 찾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도착한 즉시 어항을 찾아야 했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한국으로 수출할 곰장어를 어획한 후 급랭한 다음 한국으로 수출할 차비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뿌에르또 나탈레스 어항에서 반갑게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다. 너무 반가웠다.


그의 안내로 올라가 본 어선의 어창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곰장어들이 마구 뒤엉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다음 여정을 준비하며 장도에 오른 것. 







천국이 코 앞에 널브러져 있는 곳


나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 밖의 풍경을 만났다. 바람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나무와 풀꽃들을 바라보며 우리네 삶 혹은 나의 삶을 뒤돌아 보고 있었던 것. 바람의 땅에는 만개한 쑥부쟁이 꽃이 빼곡히 널려있었다. 바다에서는 무시로 바람이 불어오며 바다를 못살게 굴었다.  비록 바람이 쉼 없이 부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던 쑥부쟁이는 물론 풀꽃들을 보니 천국이 코 앞에 널브러진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신들은 직선과 콘크리트로 도배한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지 파타고니아 곳곳에서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일찍이 이 같은 모습을 깨우친 내가 좋아하는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은 당신의 작품 <예술가의 십계명>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이렇게 노래했다.





예술가의 십계명 


첫째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아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릴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림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 도주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 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지천에 널린 아름다운 풀꽃들을 보니 예술가의 십계명이 절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십계명을 비수처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건 십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당신 속에 신이 함께 동행한다고나 할까. 




쑥부쟁이가 지천에 널린 마을 곁 저 멀리 우리 여정에 포함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쑥부쟁이가 점령한 바람의 땅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능력은 단순히 자아로부터 발현된 현상이 아니라 신이 함께해야 가능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신은 사라졌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도시에서 사라진 신들은 세상의 청정지역 파타고니아에서 오롯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


"첫째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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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식물들은 사람의 길을 절대 침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아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릴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림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 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먼 나라 먼 땅 바람의 땅을 찾아 나선 건 K 씨뿐만 아니라 풀꽃들이 동행했다. 하지만 당신의 눈에 밟히는 건 바람에 날려온 풀꽃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신의 그림자는 늘 눈 밖에 나 있는 것이랄까. 파타고니아 여행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건 신의 그림자를 만든 출처인 대자연이다. 




세상의 출세길에 매달려 세월을 보내는 동안 신의 그림자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우리가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신의 동행을 느끼며 행복해할 텐데, 바람에 날려온 쑥부쟁이들만 행복에 겨워 활짝 웃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의 주장.. 바람의 땅에 발을 디디면 사는 동안 잊고 지내던 신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목 놓아 펑펑 울어도 시원찮을 억울한 일이나, 가슴에 너무 오랫동안 품고 살았던 그리움 등 나를 힘들게 하던 것들을 다 토해내게 된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당신을 감동케 할 것. 그 즉시 한결 가벼워진 당신의 존재를 느낄 것 같다. 나의 오랜 여행 경험담이다.



모처럼 적지 않은 여행사진들을 선보였다. 지금 선보인 사진들 중에는 죽기 전에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사진이 포함됐다. 많은 사진을 촬영한다고 해도 모두 다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닌 것.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의 십계명에 따라 그동안 가슴에만 품고 있던 사진들이 세상 빛을 보면서 동정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있다면,  그건 신의 그림자를 공유하라는 뜻이 아닐까.




한 때 번영을 누리던 뿌에르또 나탈레스 항구는 점점 더 쇠퇴해 가고 있었다.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유명한 관광지이자 휴양지인, 또레스 델 파이네 혹은 피츠로이 산군이 위치한 엘 찰텐의 거점 도시로 주로 활용할 뿐이다. 또 이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은 짬만 나면 다른 중소도시 혹은 대도시로 이동할 꿈을 꾸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은 늘 흥망성쇠를 반복하지만, 신의 그림자는 태초로부터 영원불멸로 이어지는 것.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간 자리에 오롯이 꽃잎을 내놓은 쑥부쟁이가 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뱃놀이에 열중한 한 관광객 뒤로 쑥부쟁이 꽃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쏙 빼닮았다.



*아래는 예술가의 십계명 원본을 참고 자료로 실어두었다.

Decálogo del artista

I. Amarás la belleza, que es la sombra de Dios sobre el Universo.
II. No hay arte ateo. Aunque no ames al Creador, lo afirmarás creando a su semejanza.
III. No darás la belleza como cebo para los sentidos, sino como el natural alimento del alma.
IV. No te será pretexto para la lujuria ni para la vanidad, sino ejercicio divino.
V. No la buscarás en las ferias ni llevarás tu obra a ellas, porque la Belleza es virgen, y la que está en las ferias no es Ella.
VI. Subirá de tu corazón a tu canto y te habrá purificado a ti el primero.
VII. Tu belleza se llamará también misericordia, y consolará el corazón de los hombres.
VIII. Darás tu obra como se da un hijo: restando sangre de tu corazón.
IX. No te será la belleza opio adormecedor, sino vino generoso que te encienda para la acción, pues si dejas de ser hombre o mujer, dejarás de ser artista.
X. De toda creación saldrás con vergüenza, porque fue inferior a tu sueño, e inferior a ese sueño maravilloso de Dios, que es la Naturaleza.

-Gabriela Mistral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쓰다.



*아래 '가을의 전설(메인테마) OST'를 배경음악으로 글을 읽으면 감흥이 더 크게 다가올 것. (내 생각..! ^^)


LA NOSTRA VIAGGIO SUD AMERICA
Puerto Natales Patagonia CIL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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