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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Apr 18. 2019

추억이 밥 먹여준다

-나우엘 우아피 호수에 박제된 한 유람선


혹시 재산목록을 작성해 보신 적 있나요..?


최근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 가끔씩 눈팅하는 한국의 소식 속에는 한 재벌 총수의 죽음이 눈에 띄었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직후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켜 '하늘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썼다. 그는 정말 하늘을 사랑했을까.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일가의 재산이 수천억 원에 이르고 2세들은 재산 때문에 진흙탕 싸움을 한단다. 또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탈세하는 등의 수법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한다. 죽기 전까지 그의 가족들이 세상에 물의를 일으켜 가며.. 그러니까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건 하늘이 아니라 돈이었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보다 그가 가진 돈 때문에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수 억 원도 아니고 수 백억 원도 아닌 수천억 원 이상의 재산을 가졌다면 세상에 더 부러울 게 없을 것.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서두를 재미없는 가십(gossip)으로 장식한 건 다름 아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부지기 수인 것. 그중 한 두 가지 예를 들면서 부제로 써 둔 나우엘 우아 피 호수에 박제된 한 유람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위치는 북부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의 나우엘 우아피(Nahuel Huapi) 호수 선착장의 모습이다. 우리는 빅토리아 섬으로 떠나기 전 선착장에 도착해 출항을 기다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내려다본 호수의 물은 수정같이 맑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사람들은 이 호수가 안데스와 잘 어우러져 '남미의 스위스'라 부르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붙인 대명사이다. 그러나 실상은 스위스와 전혀 다른 풍경이며, 라틴 아메리카 혹은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서 이런 풍경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따라서 세계인들이 남미 여행을 계획하면 버킷리스트에 반드시 담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여행지를 우리는 두 번씩이나 방문하는 행운을 누렸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5년 전에 그리고 최근에는 8년 전에 다시 방문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료사진은 8년 전에 촬영된 풍경들인데.. 글쎄 이게 때를 잘 만나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몇몇 풍경들은 필자의 블로그 등에 사용된 적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들은 브런치에 처음 선을 보이는 것들. 


대략 15년 전의 인터넷 환경은 마치 중세를 떠올릴법할 정도로 낙후되었었다. 그러니까 인류문화사를 통틀어 요즘의 1년이란 예전의 100년에 해당할 정도 이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루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맨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지닌 카메라와 두 번째 지닌 카메라의 종류와 성능 조차 달랐다. 처음 방문했을 때 지닌 카메라에 탑재된 메모리칩의 분량은, 여행 일수를 감안하여 대략 하루에 20컷 정도밖에 촬영할 수 없었다. 따라서 특정 장소에서 반드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풍경만 카메라에 담는 것. 


정말 갑갑했다. 이유가 있었다. 어디를 가나 사방팔방 눈에 띄는 전부가 새로운 것들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랄까. 따라서 처음 남미 일주를 끝마치고 귀국한 후 다시 열어본 기록들 속에는 빠뜨린 게 너무 많았다. 잠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면 " 아 그때 왜 그 장면을 포착하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절로 생기는 것. 



그래서 두 번째 파타고니아 투어에 나설 때는 카메라를 신종으로 바꾸는 한편 아예 1 테라바이트 외장하드와 16기가 바이트 메모리칩(카메라용) 4개를 동시에 지니고 다녔다. 이후 어디를 가나 장기간 여행을 떠날 때면 습관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자료사진은 원판의 현장감 있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어서, 이 기록들은 주로 서랍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어느 날 화들짝 깨어난 것이다. 동기부여를 브런치가 한 셈이었다. 또 만에 하나 이런 기록 습관들이 없었다면 어떤 기회가 다가왔을 때 속수무책일 것. 행운이었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니 변한 게 없었다. 나우엘 우아피는 옥빛 구슬을 마구 흩뿌려 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수 위로 실려오는 안데스의 흙냄새는 또 어떻고.. 그런데 승선이 시작되면서부터 안타까움이 엄습했다. 우리가 타고 가야 할 유람선이 바뀐 것. 모데스타 비토리아가 퇴역을 한 것이다.



우리가 처음 이용한 유람선은 모데스타 비토리아(Modesta Vitoria) 호였지만, 이번에는 쾌속 유람선이었다. 두 선박은 건조 시기도 다를 뿐만 아니라 외관은 물론 엔진까지 전혀 달랐다. 모데스타 비토리아가 동작이 굼뜬 노인이라면 새로 건조된 선박은 동작이 날쌘 젊은이의 모습이랄까. 



링크해 둔 자료에 따르면 모데스타 비토리아는 1937년에 건조되었으므로  퇴역할 당시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퇴역할 때까지 나우엘 우아피를 찾은 수많은 세계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며 추억을 만들어 주었을 텐데, 그 속에 우리의 꽤 오래된 추억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그래서 쾌속 유람선이 출항을 할 때까지 혹은 다시 숙소로 돌아와 귀국할 때까지 또 지금 이 순간까지, 나우엘 우아피 호수와 모데스타 비토리아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용케도 마지막으로 그의 등에 업혀(?) 유람을 하는 행운을 누렸던 것. 돌이켜 보면 그는 너무 힘이 들었던지 가뿐 숨소리(찰그닥 거리던 엔진 소리)를 내뱉으며 호수 위를 천천히 다녔다. 또 미려한 나무와 황동으로 장식한 외관은 품성이 곱고 너그러운 아저씨의 풍모를 닮아 안데스가 품고 있는 나우엘 우아피와 너무 잘 어울렸던 것일까


 

우리가 탄 쾌속 유람선이 출항을 할 때 나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나칠 때 오래 전의 추억을 회상하며 셔터를 눌러댄 것. 그는 퇴역을 했지만 여전히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의 한 선착장에서 유람에 나서는 관광객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을 때를 예비해 둔 것이라 할까. 마치 추억을 박제해 둔 듯 아름다운 풍모를 지닌 채 선착장에 기대어있다. 이렇게..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아름다운 모데스타 비토리아호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면, 수많은 호화 유람선은 물론 요트 등과 비교당하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었겠다. 또 한 때는 이 유람선이 누군가의 재산목록 1호로 등재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역할을 바꾸어 나우엘 우아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여전히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 우리가 잘 아는 오스트리아 출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시인이자 작가)이런 명언을 남겼다.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표현은 매우 역설적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추억을 위한 것이라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매 순간 일어나는 상황이 모두 추억으로 남을 것. 어느 날 모데스타 비토리아호처럼 퇴역을 앞둔 시점에 당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 어떤 추억이 당신을 행복하게 할까.



모데스타 비토리아호는 말이 없다. 말이 없었다.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엔진 소리와 우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본 기억들. 그리고 아라야네스 숲을 다녀온 우리를 데리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정처럼 맑은 호수 위로 데려갔던 기억들.. 





릴케는 추억을 살리기 위해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늘 먹던 밥 외에 또 다른 양식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절실함이 추억이란 걸 깨닫게 되면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이도 달라질까. 


서두에 재산목록을 꺼낸 것도 추억과 관련이 있다. 한 재벌의 추억 속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록들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당신과 일가 전체를 발가벗긴 결코 아름답지 못한 추억들이 세세토록 전해질 것. 그의 재산 목록 속에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뿐만 아니라 부동산, 적금, 예금, 현금, 증권 등 온통 돈으로 도배된 기록들.. 





누군가 나의 재산 목록 1호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를 행복하게 만든 추억 속의 사람들과 그리고 외장하드 빼곡한 기록들이 전부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 나의 삶을 지탱하는 건 단 두 가지 밥과 추억이지 아마도.. 그래서 아내와 함께 여행에 나서면 가끔 이런 말을 나누곤 한다.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 지식을 살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그 귀하신 몸으로 어떻게 발품을 팔지..?"



우리가 다닌 여행지는 주로 발품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나우엘 우아피 호수이며, 이곳에서 쉼을 얻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모데스타 비토리아호에 우리의 추억이 박재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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