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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Nov 19. 2019

미쳐야 느낄 수 있는 황홀한 아침

#14 아내와 함께한 여행 사진첩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사진첩을 열어 날짜를 보니 이날은 2012년 10월 1일 추석이었다. 어른들이 다 돌아가신 후부터 명절이 썰렁해진 우리가 찾은 곳은 한계령 오색이었다. 그곳에 오래전에 만난 한 시인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사( 寒士_차갑고 반듯한 선비라는 뜻) 정덕수..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은 통기타 가수 양희은 님이 부른 '한계령'은 기억해도 노랫말을 작사한 시인의 이름은 잘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남양주의 분위기 좋은 어느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그를 아우님이라 불렀고, 그는 나를 형님으로 부르며 가끔씩 술자리에서 장난을 치는 사이로 발전했다. 마치 친형제처럼 흉허물없이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오색에서 만나게 됐다. 대청봉으로 함께 등반을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육필로 부른 노래 한계령을 감상해 보고 난 후 우리가 동시에 미쳤던 날을 잠시 돌아보기로 한다.





한계령에서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 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가수 양희은 님의 '한계령' 노래 듣기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은 정덕수 시인(이하 '아우님'이라 한다)이 노래한 한계령의 노랫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더군다나 한계령을 부른 양희은 님이 한계령을 너무 곱게 부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랫말의 실체를 알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가끔 아우님은 술좌석에서 흥에 겨운 좌판의 요구에 응하며 금세 표정이 달라진다. 시를 쓸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노랫말들은 금세 날개를 달고 좌중을 휩쓸며 여러분들을 시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것. 그동안 아우님의 표정은 심각함 이상으로 변하며 당시를 회상하는데 아내와 내가 아우님을 처음 만나 반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육필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온몸을 던져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평생 시 낭송이 이렇듯 가슴에 와 닿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좌중은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계령의 바람이 다시 한번 더 휩쓸고 가면 힘들게 오른 산을 하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 시인의 표정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좌중은 박수와 함께 술을 권하며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한 번쯤 육필로 쓴 그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노예가 될 게 분명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를 쓰고 소설을 쓰지만 대체로 그들이 쓰는 글은 머리로 쓰는 게 대부분이지만, 아우님의 노랫말은 온몸을 던져 쓴 글이라 할 수 있고 마음 가는 대로 바람처럼 자유롭게 부른 노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추석 전 전화를 통해 의기투합하고 일정을 조율한 후에 아우님의 집이 위치한 한계령 오색에서 만났다.  이날 우리는 당일치기로 대청봉을 다녀오는 보통의 산행과 다른 일정을 조율했다. 산에서 1박 2일을 지내기로 한 것이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비박'과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각자의 텐트를 준비하고 오색으로부터 등반을 시작해 대청봉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희운각 대피소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서 다시 신선대에 오르는 것. 그 후 천불동 계곡을 따라 하산하여 설악동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이 같은 여정은 아우님의 노랫말 속에 감추어진 산길로 이어졌는데, 이곳에 살고 있는 토박이 외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험준한 산길이었다. 




아우님은 이 산길을 통해 산나물을 채취하는 등 산에 올라 삶을 영위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오색의 오목골에서 태어나 당시에 살고 있던 오색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땔감나무를 해 오곤 했던 것인데, 먹는 날 보다 주린 날이 더 많았다고 술회한다. 


그곳에서 한계령을 오르내리며 땔감과 산나물을 채취했던 것. 그런 그가 한계령을 쓴 때가 1983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우리가 등반을 위해 만난 날짜가 우연히도 한계령 시를 지은 지 거의 30 돌 되는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미리 계획한 일정대로라면 10월 2일에 설악동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비선대 휴게소에서 지인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신 것. 그리고 다음 날 설악동으로 하산한 것이므로 2박 3일의 일정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란 생각이 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등반이 시작된 이날, 우리는 아우님의 생계를 이어주었던 산길을 따라 야영지까지 이동했는데 배낭의 무게가 여간 만만치 않았다. 한계령에서 태어나 설악산 곳곳을 누비며 산사람으로 자란 아우님은 산길이 평지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말을 안 해서 그렇지ㅜ) 죽을 맛이었다. 


등에서 머리 위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배낭 속에는 우리가 먹을 1박 2일의 양식과 물은 물론 텐트까지 빼곡히 쌓였다. 그리고 내겐 나의 분신과 다름없는 묵직한 카메라까지 대동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만 천국을 경험하게 만들지 아마.. 아우님이 산행을 할 때 지샌 야영지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눈 앞에 황홀한 광경이 펼쳐졌다. 

숲 속으로 스며든 빛이 단풍잎과 조화를 이루며 천상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 그 장면들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날 카메라만 지참하지 않았다 해도 몸이 한결 가벼웠을 테지만, 사진첩을 열어보는 순간 탁월한 선택으로 바뀌고 있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그저 기억 속에서만 가물가물 거릴 게 틀림없었다. 나는 미쳐서 얻은 사진 몇 장이자 황홀한 추억이지만, 아우님은 이런 풍경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매일 매 순간 고난을 통해 얻은 삶의 터전이 이 산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날 아침 이 깊은 산중에서 목마를 때 찾는 곳이라며 바위 틈 낙엽에 덮힌 샘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야영한 깍아지른 고도에 있을 리 만무한 작은 샘이 그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곧 짐을 챙겨 끝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비경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릴 줄 꿈엔들 알았으리요. <계속>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쓰다.


LA NOSTRA VIAGGIO SULLE MONTAGNE
il Parco Nazionale Monte Seolak CORE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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