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뒤덮인 설국의 광평대군 묘역
모두 다 잘 될 거야(Andrà tutto bene)!..
안드라 뚜또 베네!..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기 전 열심히 공부하던 이탈리아어 문장 중에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기분 좋은 말이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이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면 결과는 그에 순종하여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것. 전자의 경우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꿈꾸는 그곳이란 어슴푸레한 믿음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시종일관 게을리하지 않으면 그에 순응한 세상에 어느 날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매사를 안 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장착되면 당신이 꿈을 꾼 방향으로 가게 되는 이치가 안드라 뚜또 베네라는 말이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얼마나 생생한 지 생시 같은 일이 꿈속에서 일어났으며 생전 듣보잡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분들은 나를 환대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커다란 사발에 막걸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여러분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은 마치 명절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다음 한 순간에 그곳에 모인 분들 중에 어릴 때 뵈었던 숙모님 또래의 세 분과 맞절을 했다. 나는 그분들에게 엎드려 절을 올리면서 '건강하시라'고 화답을 했다. 그중 한 분의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날 더러 "우리하고 얼굴은 다르네.." 하셨다.
그다음 일행 모두는 선산으로 향했는데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에서 줄지어서 이동하면서 조금 전 우리가 묵었던 장소의 집들을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그 즉시 나는 "이곳이 명당임에 틀림없구나"하고 생각했다. 문중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장소는 귀족의 거처가 틀림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 장소가 광평대군의 일가가 살았던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날 광평대군께서 나를 초대하여 대접을 한 것이랄까.. 잠에서 깨어나 휴대폰 액정에 등장한 시간을 보니 오전 5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평대군 께옵선 꿈속에서 왜 날 찾아오셨을까.. 그래서 즉시 컴을 열어 꿈에서 인지한 광평대군의 흔적을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찾아보았다. 그곳은 우리가 강남에 살 때 가끔씩 들렀던 강남의 수서동의 나지막한 광평대군 묘역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다. 우리 문중의 묘역도 아닌데 이곳을 찾은 이유는 조선왕조 중에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분들이 영면하는 곳이자 장소가 빼어난 곳이었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먼발치서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면 마음이 얼마나 평온해지는 모른다. 그래서 2008년, 2009년, 2010년 그리고 2013년에 하얀 눈이 오실 마다 들러서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간밤의 꿈자리에 등장한 모습이 우리의 일상 혹은 나의 운명에 어떤 영행이 미칠까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에 기록된 광평대군의 모습은 이랬다.
광평대군 묘역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의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 씨(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그리고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을 비롯한 종문 800 여기의 묘소가 같이 있다. 또한 이곳은 종가 재실(齋室)의 오랜 가옥이 있는 공동묘역으로서, 이 때문에 마을을 궁말[宮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평대군의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으로, 세종 7년(1425) 5월에 탄생하였다. 세종 14년(1432) 정월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5년 후에는 세종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공순공[恭順公, 후의 장혜(章惠) 방번이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온 대군은 문장은 물론 활쏘기와 격구 또한 잘하고 음률과 산수에 밝아 특히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양된 후에는 안암동(사당말)에 양부의 사당을 짓고 그 후 7년간을 기거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결혼하여 영순군 부(溥)를 두었으나 세종 26년(1444) 창진(瘡疹)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장의(章懿)로 장(章)은 경신고명(敬愼高明)을, 의(懿)는 온유현선(溫柔賢善)을 의미한다. 광평대군의 묘는 처음에 경기도 광주 서촌 학당리(현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있었는데 연산군 원년(1495) 3월 이곳이 성종의 왕릉인 선릉(宣陵) 터로 정해지면서 광수산(光秀山)의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다.
광평대군과 부인 신 씨의 묘소는 높은 언덕 위에 각각의 무덤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 묘비와 낮은 받침돌을 둔 혼유석(魂遊石)이 갖춰져 있다. 하단에는 2기의 장명등(長明燈)과 우측에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또 한 단 아래 좌우로 문인석(文人石) 2구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있는 양식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선 초기 대군묘(大君墓)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도비는 명종 7년(157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심의겸(沈義謙)이 짓고, 두전(頭篆)은 박렴(朴簾)이 썼다.
대군의 묘 아래에 있는 제각(祭閣)의 동쪽에는 '廣州治西光秀山李氏世葬記(광주치서광수산이 씨세장기)'란 이름의 세장기비(世葬記碑)가 있다. 이는 숙종 21년(1695)에 조사한 186기 무덤의 위치를 조사한 내용을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낸 후손 이유(李濡)가 짓고, 이담(李湛)이 쓴 것을 비석에 새긴 것으로 가족 묘소로서의 오래고도 광대한 면모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묘역은 서울이나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이며, 분묘와 비석, 그리고 부속물들은 조선시대 분묘 내지 석비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우리 선조님들 중에는 패악질을 일삼은 군주도 있었지만, 선정을 펼치며 선량한 백성을 돌아본 분들이 적지 않다. 요즘도 그런 낯선 풍경들이 권력을 앞세워 등장하고 있다. 여간 꼴불견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뉴스를 멀리하고 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광평대군께옵서 나를 꿈속에 초대하여 대접을 하고자 했으므로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가 아닌가 에둘러 꿈해몽을 해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말이나 행동이 결과로 반영되는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또는 1:29:300의 법칙)과 매우 닮아있는 것이랄까.. 짬이 생겨 여러 차례 광평대군 묘역을 찾아 여러분들께 알린데 대한 고마움을 광평대군께서 베푸신 것이라 생각하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서 5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했지만 7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내가 한 일은 이웃을 만나지 못할 만큼 바쁘고 까다로웠으며 지혜를 총동원하여 하나의 일을 완성해야 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장도에 올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주 바를레타의 집에서 키보드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지내놓고 보니 꿈같은 일이 벌어졌으며 나의 힘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 하늘이 간섭해야 될 일들이 7개월 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자칫 여한으로 남을 일 모두를 해결해 놓고 보니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덮인 광평대군 묘역을 바라볼 때처럼 평온해지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무엇을 하든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살면서 터득했다. 우리 앞에 등장한 일들을 보면 때로는 나쁜 모습으로 때로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만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코로나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그분들이 살고 있는 잡 앞에 "안드라 뚜또 베네"라고 적어놓은 걸 감동 깊게 봤다.
우리는 지난 7개월 동안 한국에 지내면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결실을 맺고 장도에 다시 오르게 된 것이다. 간밤에 꾼 꿈이 보다 자세히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꿈속에 나를 초대해 주신 광평대군 일가 사람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문중은 달라도 선한 이웃의 도움이 다시 나와 하니를 일으켜 새울께 틀림없다. 무엇이든 꿈 보다 해봉이 좋아야 한다.
Che sogno meraviglioso! Che è venuto a Cercarmi!_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
il 06 Marzo 2023, La Disfida di Barletta in in Puglia_IT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