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내와 함께한 여행 사진첩
잔잔한 감동 속으로 빠져드는 곳..!
파타고니아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어느 날 아침 전혀 뜻밖의 풍경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매우 아담한 도시 코크랭.. 우리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여행의 피로도 풀 겸 잠시 쉬었다가 가려던 참이었다. 뿌에르또 몬뜨에서부터 이어지는 까르레떼르라 오스뜨랄을 따라 파타고니아 남부로 이동하는 동안 적지 않은 피로가 쌓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게 됐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동네 뒤편에 자리 잡은 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눈 앞에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엉겅퀴가 보라색 꽃을 내놓고 우리를 반긴 것. 그곳은 보라색으로 수놓은 엉겅퀴의 나라였다. 아침햇살을 받은 엉겅퀴는 신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이든 고귀하면 가시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곳의 엉겅퀴는 우리나라와 달리 꽃술도 클 뿐만 아니라, 이파리에 나 있는 뾰족한 침들이 매우 억세어서 함부로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를 두고 엉겅퀴를 뷰파인더로 바라보고 있자니 (오 이러면 안 되는데..!) 셔터가 절로 눌러진다. 엉겅퀴 삼매경에 빠져든 것이다.
청정한 작은 도시 코크랭은 그야말로 때 하나 묻지 않은 곳으로 남반구(47°15′17″S 72°34′30″W)에 위치해 있다. 해발고도는 147미터로 매우 낮은 곳이자 도시를 이루고 있는 지반은 거대한 암석 위에 세워진 곳. 이곳에 사는 시민들은 2002년 기준 3천 명이 채 안 되는 곳이다.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를 나서면 5분이면 시내(시내랄 것도 없지만)에 도착하고 10분이면 마을을 관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 살면 짧은 시간 내에 아무개는 물론 개나 소도 다 알 수 있는 곳이랄까.
글쎄.. 그렇게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니 보다 큰 도시 코자이께 혹은 뿌에르또 몬뜨에서 살아보는 것이란다. 나는 그들의 꿈이 왜 그런지 단박에 이해됐다. 칠레의 기다란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된다. 도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생활환경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또 이들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도시로 유학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생각을 비웃듯 이들이 사는 고장의 코 앞 혹은 바로 곁에 천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엉겅퀴의 나라'로 고쳐 불렀다. 도시의 삶에 찌든 어느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 풍경이 코 앞에 펼쳐지면서, 정작 이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날 아침 발을 내디딘 그곳에는 귀족의 빛깔로 꽃단장한 엉겅퀴들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꽃술을 내놓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이런 풍경들은 주로 외장하드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꺼내본 사진첩의 사진들은 그동안 발효를 거듭하여 가슴속에서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 혹은 그 보다 더 많은 날을 이곳에서 머물러야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무엇이 바빠서 그토록 빠르게 남부 파타고니아로 이동했더란 말인가..
돌아갈 수 없다면 잊어야 할까..?!!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열어본 사진첩 속에서 만난 엉겅퀴의 나라의 풍경이, 이제는 식 재료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탈리아에 둥지를 트면서부터 조금은 달라진 생각들.. 엉겅퀴 속 까르치오피는 이탈리아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의 식재료이며, 주로 꽃이 피기 전의 봉오리를 취해 요리를 해 먹는 것이다. 그들은 엉겅퀴과의 한 식물을 입으로 먹지만, 내 앞에 놓인 풍경들은 결코 입으로 먹을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다.
아내와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 이들 엉겅퀴들은 마음의 양식으로 죽을 때까지 가슴에 담아도 모자랄 것이다. 주말 아침 열어본 사진첩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보라색 엉겅퀴들이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계속>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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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