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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r 31. 2019

황당했던 기록이 만든 놀라운 습관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행복의 느낌

주말에 뭐하세요..?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의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의 말을 빌리면 초여름 날씨 같단다. 그도 그럴 게 한 며칠 동안 조석으로 적당히 찬 공기가 구시가지 곳곳을 누비고 다닐 정도였다. 나는 이탈리아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주말만 제외하면 거의 매일 시내 중심에서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일 뽄떼 산따 뜨리니따를 오간다. 이유가 있다. 


진귀한 요리를 허겁지겁 먹지않듯이 이탈리아를 통째로 야금야금 맛보기 위한 준비를 나름대로 철저히 하기 위해 여전히 이탈리아어 수업(Corso Intensivo di italiano)에 매달려있는 것. 인텐시보 과정은 1년이면 마무리되지만 주 5일 강도 높게 진행되는 수업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오전 9시 20분부터 시작된 수업은 오후 1시가 되어야 마무리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때도 있다. 숙제가 없는 날이다. 아마도 학생들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숙제가 아닐까. 



숙제란 나처럼 공부보다 놀기 바빴던 아이들에게는 여간 미운 녀석이 아니었다. 그래서 등교시간을 앞두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설치며 벼락치기로 후다닥 해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은 평소의 습관이지만 방학이 되면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하루 종일 숙제에 매달리는 날도 있다. 왜 그랬을까?


한 달 이상 장기간 놀이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가장 귀찮은 숙제를 마무리해 놓아야 놀이가 한결 부드럽고 기분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지는 것. 그래서 가장 난도가 높은 숙제를 펴 놓고 머리를 쥐어짜며 숙제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숙제는 도대체 어떤 과목이란 말인가.. 상상이 되시는가?



내가 머리를 쥐어짜며 매달리 숙제는 다름 아닌 일기였다. 매일 놀기도 바쁜 녀석이 일기는 언제 쓴단 말인가. 그것도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벼락치기로 해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어린 녀석의 머리통 속은 온통 음흉한 흉게가 도사리는 것처럼 장기간의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뒤엉키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략 한 달 동안 일어날 미래의 일을 현제 시제로 작성해서 공책 한 권에 기록하는 것. (어른들이 보시기에 얼마나 기특했을까?ㅋ)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생각이 짧고 단순한 초등학생(국민학생)이 작성해 둔 프로젝트(?)는 숙제보다 더 힘든 험난한 과정을 잉태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일기장에 비뚤비뚤 써 내려간 미래의 일이 어린 녀석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상상 속의 미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또 절실히 필요할 때가 부지기수였으므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일이다. 대략 이랬다.



1963년 8월 00일 날씨 흐림, 비가 올 수도 있겠다 
오늘 아침에 나는 뒷마당을 비짜루로 쓸었다. 할머니가 보시더니 우리 손자 이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끝 


만약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이런 내용을 보신다면 손자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고 뭐라고 하실까.ㅋ 솔직히 내 기억 속에 할머니에게 칭찬을 받은 적은 있어도 뒷마당을 쓴 기억은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런데 엉터리 프로젝트를 통해 이룩해 둔 나만의 업적(?)은 훌륭했다. 이를 테면 비용이 들지 않거나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발품을 팔면 행복해지는 일을 찾아 실행에 옮기는 것.



어떤 날은 죽마고우들이 나 때문에 혹은 의기투합해서 먼 산의 계곡으로 멱을 감으러 가거나, 출출해지면 동네 근처의 과수원에 들러 서리를 일삼기도 했다. 일기에 그렇게 써놓았으므로 계획된 범행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절도범으로 처벌은 안 받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외상값(?)을 다 계산해 주셨다. 과수원지기가 어린 녀석들이 복숭아를 훔치는 일거수일투족을 먼발치에서 다 보고 있었던 것.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완벽한 범행이라며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었다. 좋아했었었지.


이탈리아어 인텐시보 과정에서 나의 유년기를 묻는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로 다르지 않았던 유년기를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정형화된 세상에서는 상상 조차 불가능한 일이 당시에는 가능했던 것. 나는 이런 유년기를 통해 행복해지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고나 할까. 



내 기억 속에 풍성하게 자리매김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시사철 아무 때나 바깥세상으로 나를 끌어내려 보챘다. 돌이켜 보면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연을 벗 삼아 어리론가 떠나곤 했다. 그곳에는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오롯이 펼쳐진 곳이자, 아무 때나 어느 곳이나 머리를 뉠 수 있는 티 없이 맑은 대자연이 나의 방문을 기다린 곳. 


그때부터 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고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행복한 일 보다 불행하거나 힘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기록해 둔 아름다운 기억들은 나쁘거나 힘들었던 기억들을 말끔히 정화시키며 행복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아끼는 재산 목록 1호는 다름 아닌 기록이며 기록장치이다. (ㅋ 요즘은 엉터리 프로젝트 안 써요. ^^)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정확히 이맘때 서울 강남구 대모산 기슭에 막 피기 시작한 앙증맞은 생강나무꽃들 


오늘은 주말, 한 주동안 바빳던 일상을 잠시 뒤로 하고 아내의 충고에 귀 기울인다. 미켈란젤로의 도시(나는 이렇게 부른다) 피렌체는 1년 내내 관광객들로 차고 넘치는 곳. 특히 주말만 되면 발 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여서 우리는 웬만하면 인파를 피해 교외로 떠난다. 르네상스가 남긴 때묻은 발자취보다 새로운 생명들이 부활의 대합창을 부르는 아르노 강변이나 피렌체가 잘 조망되는 장소로 떠나는 것. 사람들이 열심히 미켈란젤로에 열광하는 사이 여전히 나를 위한 또 우리를 위한 발품을 판다. 아내가 제안했다. 어디론가 떠나잔다.


"아르노 강변 근처에 보랏빛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폈어.."


"그래?..아니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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