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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r 02. 2020

바람이 남긴 지난겨울의 언어

-아드리아해 바를레타 사구((砂丘))

바람의 나이..!!



서기 2020년 3월 2일 일요일 아침, 날씨 화창 화창 구름 조금 바람 몇 점.. 풀꽃들이 자지러진 곳은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바닷가 3월의 풍경. 본격적인 농사를 앞두고 광활한 평원은 서서히 몸풀기에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곳곳에 밭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는 농부들.. 


머지않아 이곳은 온갖 채소들로 넘쳐날 것이다. 바닷가로부터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곳. 그 가운데로 2차선 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너머로 농토가 펼쳐진 것이다. 그곳은 나지막한 사구 너머에 주단처럼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그 곁으로 바람에 날린 야생 열무가 살아가고 있었다. 또 아드리아해로부터 날아온 모래 알갱이들이 한 알 두 알 쌓이면서 접어둔 비단결처럼 아름답다. 





일요일 아침 이른 새벽, 아내와 나는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방을 서성댓다. 이틀 전 초행길에 걸어본 바닷가 운동 코스가 너무 좋다며 이번에는 꽤 먼 거리를 소풍 삼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참 부지런한 사람.. OK!! 



꼭두새벽부터 김밥 도시락 준비를 하는 것이다. 쌀을 압력밥솥에 올려놓고 곧바로 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간밤에 미리 준비해 둔 소갈빗살과 김치와 치즈 조각을 넣은 김밥이 만들어질 것이다. 한국에서 공수되어온 서천 김은 빛깔도 좋고 맛도 너무 좋은 최고급 김이었다. 거기에 이탈리아산 식재료들이 어우러져 아점용 도시락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료는 커피 원두를 갈아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 속에서 적당히 얼린 냉수가 우리와 함께 동행할 것이다. 이 같은 절차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을 분담하여 후다닥 해치운다. 창밖을 보니 아직 날이 어두워 오전 7시 정각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나서면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멀리 바다가 보인다. 그동안 주말에 걸어본 바를레타 중심의 뷔아 치알디니를 지나치게 된다. 토요일 저녁 아내는 이 거리를 걸으면서 "참 알 수 없는 묘한 도시"라고 말했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풍경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관련 브런치에 언급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아내가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무엇보다 도시 전체를 떠 받치고 있는 대리석과 대리석으로 지은 오래된 건축물을 마음에 들어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된 게 없는 도시의 풍경들.. 그 속에 카페와 리스또란떼 그리고 잘 차려입은 시민들이 눈에 띄며 당신이 걷고 있는 거리가 흡족했던 것.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작은 언덕 아래로 길게 펼쳐지는 아드리아해의 풍경은 종려나무 가로수 너머로 펼쳐져 있다. 오늘 아침은 바다가 잠잠하고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느새 3킬로미터에 달하는 종려나무 가로수길을 너머 바를레타 사구에 들어선 것이다. 



아내가 한국으로부터 은빛날개를 달고 날아온 지 만 일주일 만에 내가 걷던 운동코스는 절친 말동무가 생겼다. 사구를 지나 바닷가에서 아점을 나누며 커피를 마실 때까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동무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수다 속에 사구에 새겨진 무늬를 닮은 한 할머니가 등장했다.





아내가 이탈리아로 돌아오기 전 전화 통화를 하면 우리 집 위층에 사시는 할머니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 할머니의 연세는 팔순에 접어들었고 두 아들을 두었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두 아들 중 맏이는 노름에 미쳐 이혼을 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는데 짬 만나면 그 돈으로 아직까지 노름에 빠져든다고 했다. 



또 작은 아들은 40대 초반의 나이에 중풍을 맞아 쓰러져 병원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할머니는 여러 합병증으로 매일 한 움큼에 달하는 알약을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 허리도 시원치 않아 오래 걷지도 못하고 어디로 떠날 꿈은 애당초 꾸지 못하는 것. 그래서 할머니는 짬만 나면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내에게 하곤 했다. 



그런 할머니는 청상과부로 살아오셨다고 했다. 당신의 남편은 나이 마흔에 죽었다. 할머니의 표정을 살피니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이 역력했다는 것. 사람이 어떤 병력 등으로 삶을 마감하면 동정의 여지가 있기 마련인데 당신의 남편은 그 마저도 저승길에 함께 가져간 것일까.. 



당신의 남편은 노름꾼이었다. 허구한 날 노름에 미쳐 당신의 전재산을 탕진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모의 재산까지 다 팔아치워 노름 밑천으로 삼았다니.. 그리고 죽었단다. 중풍으로 생을 마감했단다. 그리고 땡볕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두 아들의 모습이 지아비를 쏙 빼닮은 것. 



참 기구한 팔자의 할머니는 노령 연금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던 것. 아내가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하자 "이제 심심해서 어떻게 사나"하고 한숨을 쉬시더란다. 아내는 이탈리아로 가져올 멸치를 할머니와 함께 삼단분리(머리,내장,몸통)를 하는 등 말동무가 되어주었는데 아내가 떠나자 그나마 말동무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겨울 내가 목격한 아드리아해의 바람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파도와 비까지 동반하는 날이면 앙칼짐 이상의 사나운 표정으로 뭍을 마구 할퀴었다. 어느 날 잠잠할라치면 다시 사나워진 바다와 바람.. 그런 풍경들은 아내가 아드리아해 너머로부터 바를레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태곳적부터 이어진 바람의 나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구에 새겨진 결을 바라보면 단박에 바람의 나이를 계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꽃가마를 타고 시집가던 날의 꿈같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신을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는 시간 저편에서 당신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지.. 3월이 되어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밭이랑이 곁에 지난겨울의 바람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저 지나칠 수 있는 풍경.. 그 속에 파란만장한 바람의 나이가 나이테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그 길을 내일 아침 다시 걷잔다.


Lo scorso inverno la lingua lasciata dal vento
il 02 Marzo 2020, La Spiaggia della Citta' di Barlett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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