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내를 유혹한 아드리아해의 바닷가
우리나라 관광객 혹은 여행자들이 잘 찾지 않는 남부 이탈리아의 명소..!
서기 2020년 6월 15일 아침, 아내와 나는 마침내 우리가 가 보고 싶었던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아래에 위치한 항구로 아드리아해 쪽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다. 도시의 이름은 바리(Citta' di Bari, PUGLIA)..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Regione Puglia)의 주도이다.
우리가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기기 전부터 아내는 발칸반도를 가 보고 싶었다. 패키지여행을 즐기지 않는 아내가 동유럽과 북유럽을 패키지여행으로 다녀오면서 가고 싶었던 곳이 그리스부터 오스뜨리아로 이어지는 아드리아해 동쪽의 나라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려면 거쳐야 하는 곳이 바리 항구(Il porto di Bari (in sigla BRI) )이다. 바리 항구에서 훼리호(il Traghetto)에 몸을 싣고 머나먼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 것.
위 뿔리아 주 자료 사진은 바리 시와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뿔리아 주 지도로, 링크(Mappa della Puglia ad alta definizione)를 열어보면 큰 사진으로 볼 수 있다.
희한한 일이다. 아내가 그런 꿈을 꾼 지 새까맣게 오래된 어느 날, 우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둥지를 트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에서 바리까지 거리는 정확히 66.4킬로미터이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지근거리에 바리 항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사흘 전, 우리는 이곳을 다녀오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한밤중에 일어나 간식을 챙기고 이른 새벽 5시에 바리로 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아드리아해 저만치서 동이 틀 무렵 우리는 바리 항구가 가까운 시내 중심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잠시 눈을 부쳤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피곤이 몰려든 것이다. 싸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아내와 동선을 같이하면 덩달아 피곤해지는 법이지.. 대략 10분 정도 눈을 부쳤을까. 바리 항구에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부 바리 항구의 아침
바리 항은 조용했다. 장소를 이동해 부두에 도착해 보니 맨 먼저 어부 두 사람이 그물을 손질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풍경이다. 부산이 고향인 내게 이런 풍경은 익숙하다. 부산 남항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곳엔 갈매기들이 늘 끼욱 끼욱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발아래 내항에는 작은 새끼 고등어들이 유영을 즐기고 있고 무지갯빛 기름띠가 파도에 일렁이고 있었다.
대체로 그곳은 주변보다 지저분했다.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바닷바람에 실려온 알 수 없는 향기가 사람 냄새처럼 여겨지던 곳. 가까운 자갈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붐볐고 좌판에는 생선들이 널려있었다. 비가 오시지 않아도 질퍽거리던 그곳. 언제부터인가 그곳은 현대식으로 바뀌고 곰장어 굽는 연기가 진동하던 풍경도 사라졌다. 그게 벌써 어느 때 일인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바리항에서 그런 풍경은 발견하지 못하고, 잘 정리된 항구에서 그물 손질을 하는 어부들과 갈매기 몇 마리만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바리 항을 건너 그리스나 중동지역으로 이동할 때만 해도, 이곳은 오늘날 나폴리항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라고 생각 없이 되새기는 말처럼, 바리로 이어지는 육상. 해상로 또한 로마로 통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불행한 역사였으며 오늘날까지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고 죽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종교는 타락한 시대였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할 종교가 특정 종교집단을 위한 수단으로 바뀔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역사가 늘 증명해 준다. 이 같은 일은 후진국의 증표처럼 따라다녔다. 정치와 종교가 혹은 종교가 정치 행위를 답습할 때 늘 불행이 뒤따랐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도 그 피해 당사자인 셈이다. 기독교가 변질된 '개독교'가 부채질한 것이다. 그런 이유 등으로 우리는 역사와 지리와 종교와 철학과 예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아내와 나는 부두 곁에 주차를 해두고 바리항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방파제를 따라 걸으며 반듯한 항구도시를 굽어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나절의 항구는 너무 조용했다. 코로나 비루스 때문인지 어시장은 문을 닫았고 인적은 드물었다.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파제 위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실루엣은 고급스러웠다.
특히 마르게리따 극장 박물관(Museo Teatro Margherita)의 위용은 빛나 보였다. 항구에 인접한 곳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정박해 있는 요트와 더불어 쇠퇴한 항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르게리따 극장은 1912~1914년에 항구 곁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불협화음이 섞여있었다. 번듯하게 세워진 건축물을 둘러싸고 대립이 발생했던 것이다.
인간들은 늘 이 모양이다. 당신의 이득을 저울질하며 다투다가 세월을 보내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이런 가십 혹은 역사가 들어올 틈바구니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고 봐도 좋다. 이유가 있다. 이순을 넘기기 이전부터 우리를 힘들게 했던 과거(우리나라의 역사)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했다. 발품을 팔며 싸돌아 다니면서 내재된 불순물을 전부 말리거나 씻어내야 하는 것. 우리에게 여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정이 대략 이러하므로 이탈리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당신을 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닐까..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아 피렌체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소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주로 이탈리아 서쪽 지방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동쪽에 속한 뿔리아 주는 명소라고 자랑할만한 게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바리도 그중 한 곳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장화 뒤축에 자리 잡은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명소랄까. 뿔리아 주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우리가 피렌체서 바를레타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이곳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을 것이다. 뿔리아 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풍경은 천혜의 아드리아해를 낀 것과 비옥한 농토였다. 거기에 천년 고도의 유산이 지천에 널린 곳.
우리는 바리 항구에 얽히고설킨 역사에 대한 흥미는 일찌감치 없었다. 다만, 간유리 속에 갇힌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잘 닦아 낼 수 있는 풍경이 너무도 그리웠던 것이랄까. 아내가 아드리아해를 좋아한 것도 다름 아니었다. 세상은 살아가면 갈수록 너무 빤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빠르게 진행되는 정형화된 세상.. 그곳에서 당신의 미래는 점쟁이의 족집게 보다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떤 학교를 다녔고 결혼은 누구와 했으며 직업은 무엇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단점과 결점은 또 무엇인지 등등.. 한 인간의 아이덴티티(Identity)가 모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삶의 괘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바리 항구를 떠나 멀리 그리스나 중동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십자군들을 보면 또 얼마나 불쌍하고 질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는가..
그래서 아내와 나의 관점은 그들이 지난 길옆 혹은 발아래의 풀꽃에 머무르고 만다. 그들은 그 어떤 종교보다 신념보다 정치 보다 예술 보다 철학 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천사들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물주의 에너지가 깃든 곳. 가능하면 사람들의 발길이 덜한 곳 혹은 인간미 넘치는 고장으로 발품을 파는 것이다. 이곳 뿔리아 주의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자부심은 그랬다.
우리가 어느 날 서둘러 찾아간 항구도시에 남아있는 건 오래된 유적과 바람과 구름과 아침햇살과 갈매기의 날갯짓과 아침을 깨운 낚시꾼과 그물 손질을 하는 가난한 어부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었던 이 도시가 우리에게 곁을 내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항구도시 바리는 십자군에게 원정길을 터준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일찍이 우리가 이곳을 꿈꾸지 않았다면, 장차 다가와야 할 발칸반도 혹은 이탈리아 장화 뒤축은 물론, 밑창에 달라붙어있는 보물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항구도시 바리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동안 살펴본 이탈리아 장화 뒤축의 모습은 이탈리아 중부 혹은 북부의 바닷가 모습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 북부 지방의 아드리아해 바닷가가 주로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남부로 가면 갈수록 바닷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그 비밀(?)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 인근 마르게리따 디 사보이아 해변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한반도 크기보다 1.5배 더 크지만 인구는 6천5백만 명으로 인구밀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농경지가 많은 뿔리아 주의 풍경은 우리가 매료되었던 파타고니아 못지않은 자연 풍광을 가진 곳이었다.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중간 기착지로 삼아야 할 곳이 뿔리아 주의 주도 바리였던 것.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의 인구는 400만 명이 조금 웃돌고, 해안선이 약 865km까지 뻗어 있는 가장 큰 해안 지역 중 하나이다. 그곳에 바위와 절벽과 모래 해변이 해안을 따라 번갈아 나타나는 기막힌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가 바리 항구를 떠나 몰풰따로 이동하면서 만난 해안선은 이탈리아의 유명 유적지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오롯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즉시 지도를 펴 놓고 우리가 다녀왔던 장소를 다시금 답사해 보니 처녀지와 다름없는 곳. 아내는 벌써부터 그곳을 탐하며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그 같은 욕심을 챙겨준 항구 도시가 뿔리아 주의 주도 바리였다면 쉽게 믿기지 않을 것. 바른생활에 익숙한 아내의 입에서 "바다가 좋다"라는 평이 나오는 즉시 천정부지로 솟는 게 남부 이탈리아의 몸값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몸소 깨달은 바 있다. 그건 인간들이 만들고 남긴 유적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벨탑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조물주의 계획에 따라 조물주가 먼저 만들어 놓은 대자연이 여행자의 눈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
항구도시의 아침을 뒤로하고 북상길에 오른 우리는 아드리아해가 품고 있는 바닷가 풍경 때문에 멈추고 다시 멈추길 반복했다. 우리나라 관광객 혹은 여행자들이 잘 찾지 않는 남부 이탈리아 명소는 우리 앞에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계속>
Mattina nel porto di Bari, nel sud Italia
il 18 Giugno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