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디자인 Mar 02. 2020

'뱀파이어-인간', '인간-인간' - 렛미인, 2008

<렛미인> 2008, 토마스 알프레드슨, 스웨덴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포스터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뱀파이어’는 시대적 고발대상의 메타포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까지 뱀파이어는 대중의 불안심리를 조성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뱀파이어는 인간과 다른 바 없는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21세기의 시대적 고발 대상은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닐까. 바쁜 일상, 1인 가구, 높은 이직률, 경쟁사회, 만연한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현대인은 반쯤 고립된 개개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인맥 다이어트’라는 신조어와 ‘결혼식 하객 알바’, ‘혼밥열풍’과 ‘밥을 함께 먹을 사람을 찾는 서비스’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시대이다. 영화 <렛미인>은 뱀파이어의 ‘초대’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 형성’을 이야기한다.


이제까지의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흑백갈등, 오리엔탈리즘, 식민주의, 남성 중심 사회 등 사회갈등이 반영되어 있었고, 뱀파이어는 백인 성인 남성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의 목을 깨물어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로 만듦으로써 사랑을 이어간다. 하지만 <렛미인>의 뱀파이어 이엘리는 연미복을 입은 키 큰 성인 남성이 아닌, 아무 옷이나 걸치는 여자아이이다(그리고 젊은 여성 대신 젊은 남성의 피를 선호한다). 또한, 사랑했던 호칸과 사랑하는 오스칼을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는다. 살기 위해어쩔 수 없이 살인해야 하는 운명에 괴로워하고, 타인의 손을 빌려 피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이 들지 않은 채, 사랑하는 이가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엘리의 모습은 살기 위해 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고,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먼저 떠나보내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오스칼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지만, 안전한 자신의 공간에서는 칼을 휘두르며 애꿎은 나무를 위협하기도 하고, 살인사건 기사를 스크랩한다. 이엘리가 피에 대한 갈망과 힘을 억누르듯, 오스칼도 공포와 공격성을 억누르는 존재이다.

이엘리는 그런 오스칼의 모습을 보고 먼저 말을 건다. 첫 대면이 오스칼에게는 자신의 치부를 들킨 사건이었는지, 그는 이엘리에게 저리 가라고 차갑게 말한다. 하지만 이후 오스칼이 마음을 열자, 이엘리는 자신이 여자아이도 아니며, 오스칼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살기 위해 살인을 하고, 죽지 못해 사는 운명의 이엘리는 예상 이상으로다가온 오스칼을 부담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들의 관계 형성 과정에는, 현실의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을 때 기억해야 할 메시지가 담겨있다. 타인과의 교류는 개인의 공간과 감정의 선을 지키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엘리는 초대받지 못한 곳에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존재여서인지,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인지 그 공간과 감정의 선을 분명하게 지킨다.

반면, 어린 오스칼은 이엘리가 못 먹는 음식을 강요하고, 함께 손바닥을 칼로 긋기를 요구하고, 그로 인해 이엘리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그녀를 차갑게 대한다. 또한, ‘초대’를 부탁하는 이엘리에게 그냥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말해 이엘리를 상처입히기도 한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준 이엘리를 자신의 내면으로 ‘초대’하고 둘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둘만의 새로운 생활을 위해 다른 공간으로 함

께 이동한다.


20년대 중반까지의 영화에서는 뱀파이어의 초대받지 못한 곳에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설정을 ‘격리’와 ‘퇴치’에 사용했다. 하지만 <렛미인>에서는 이를 통해 ‘타인을 배려하며 관계 맺는 법’을 말한다. 미숙하지만 순수한 열두 살의 오스칼 역시 이러한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인물 설정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