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쓰는 에세이
당숙이 돌아가셔서 고향에 다녀왔다.
언제부턴가 고향은 죽음을 내장하고 나를 부른다. 귀향의 8할이 죽음 때문이다. 친구가 상을 당하고, 고모가 돌아가시고, 명절엔 문중 산소에 가서 죽음을 기념하고……. 나에게 귀향은 슬픔의 여정이다.
장례식장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객지에 살다가 몇 해 전 귀향했다. 트럭에 농산물을 싣고 이 시장, 저 도시로 날라준다고 했다. 그가 객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외지 삶을 정리하고 귀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는지 무거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귀향 후의 삶이 고달픈지 그렇지 않은지 또한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깊은 주름과 검게 탄 손등에서 일상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서울로 올라오는데 돌아가신 당숙보다 자꾸 친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출향과 객지 생활, 그리고 귀향, 하지만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 그의 인생을 생각하자 문득 머물지 못하는 고래의 삶이 스치듯 떠올랐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주인공이 반전의 실마리를 찾을 때 고래가 등장하던데, 나는 친구의 삶을 더듬다가 고래의 슬픈 디아스포라를 떠올렸다.
고래의 몸에는 두 번의 이주 이야기가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원래 바다에서 살았다. 바다가 그의 고향이다. 아주 먼 옛날 고래는 지상이 그리워 바다를 떠났다. 인류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하지만 사슴처럼 큰 눈망울을 가진 이 포유류는 지상에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천적에 쫓기며 아슬아슬 살았다. 잠자리에 누우면 꿈결에 설핏 고향이 보였다. 바다가 그리웠다.
“돌아가자. 고향으로 가자.”
고래는 귀향을 결심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차근차근 이사 준비를 했다. 앞다리를 지느러미로 바꾸고, 뒷다리는 스스로 퇴화시켰다. 머리 꼭대기엔 새로 숨구멍을 팠다. 이 모든 진화의 기준은 오로지 생존이었다. 슬픔의 귀향이었다.
지상에서의 강박적인 생존 유전자가 몸속 깊이 새겨진 까닭일까? 고래는 고향에 와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 그는 매일 달린다. 천적을 살피느라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인간과 대형 상어를 빼면 고래의 천적은 대부분 자기보다 덩치 큰 고래이다. 같은 종족이 천적인 셈이다. 사람 사는 세상과 어찌 이리 닮았을까.
이 겁 많은 동물은 밤에도 달린다. 한쪽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달린다. 한쪽 뇌만 쉬고, 나머지 반은 깨어 있는 셈인데, 이게 잠이라면 잠이고 휴식이라면 휴식이다. 그것도 고작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머물 수 없는 삶, 밤에도 온전히 잠들지 못하는 운명……. 아름다운 몸짓과 장엄한 숨결, 콘트라베이스처럼 중후하게 공명하는 울음소리 이면에, 생존의 절실함이 숙명처럼 스며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두드린다.
친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새벽부터 종일 운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트럭에 시동을 걸자 벚꽃 몇 잎 사뿐 떨어졌다.
“더 있다가 갈 거지?”
운전석 창문을 열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야지. 와줘서 고마워. 운전 조심해.”
“갈게. 들어가.”
친구는 멋쩍고 어딘가 허허로운 표정을 남겨놓고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후미등 불빛이 희미해질 때까지 나는 친구의 트럭을 지켜보았다.
“좀 쉬면서 살아.”
나는 독백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람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벚꽃 몇 잎 또 떨어졌다.
*비하인드 스토리 behind story
우리는 경쟁하듯, 투쟁하듯 너무 열심히 산다. 시인 박노해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차가운 소주를 마셨다. 40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새벽에 잠들지 못한다. 노동만이 삶은 아니다. 쉬고 놀고 자는 것도 인생이다. 대한민국, 이 정도면 좀 살만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