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들어선 사서교사
어쩌다 보니 사서교사가 되었다.
꺾어진 백 살이라는 나이, 사서교사 자격증은 대학교 졸업하며 받았지만 그 분야에 대해 무경력인 나는 사서는 그림의 떡이었다. 학교도서관에 지원해 봤는데 떨어지기를 몇 번 하고 났더니 더욱 자신이 없었다.
2019년 경기도 교육청에서 사서교사를 대거 채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빠르게 접한 소식은 아니었지만 구인란을 찾아봤다. 벌써 채용이 완료된 학교들이 꽤 있었다.
사서교사인 친구와 주위 선생님들이 용기를 줬다. 이력서 꼭 넣으라고. 할 수 있다고. 이 기회를 잡으라고.
늦은 나이에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었는데 퇴직서를 제출하고 사서교사 계약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것도 고민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고민만 하면 안 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집과 학교와의 거리,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지를 찾아보며 이력서를 낼 수 있는 학교를 찾았다. 집과 근접한 학교를 골라 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회에 도전을 안 했을 경우 나이 더 먹어서 후회를 할까 안 할까를 생각하니 답이 나왔다.
면접을 봤고 한 번에 합격을 했다. 도서관과 관련되어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경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서교사가 귀한 때여서 운이 한몫을 했다. 그렇게 나는 50이 넘어 초등학교에 사서교사로 첫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컴퓨터를 잘하는 축에 들었기에 업무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전에 학교에서 근무를 한 경험도 보탬이 되었다.
선임 사서선생님께서 인수인계를 잘해주셨다. 경력이 오래된 분이라서 업무에 능숙하셨다.
도서관이라고는 대학 때 사서과에서 근로를 2년 해 본 것이 전부인 나였다. 그것도 도서관 앞에 목록함이 있던 시절이었다.
밤낮으로 조사하고 연구를 했다. 다른 사서선생님들이 했던 사례를 찾아 내가 하는 업무에 적용을 시켰다. 열심히 연수도 들었다. 인터넷이 발달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내가 사서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작가와의 만남이었다.
학생들이 책만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작가를 직접 만난다면 독서를 하려는 욕구를 끄집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처음 해에 무려 네 분의 작가를 모셨다.
학년 선생님들과 협의하여 작가들을 섭외했고 아이들에게 홍보하며 관심을 유도했다.
가능하면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참여하도록 사회자도 선출했다. 지원자가 예상외로 많았다.
“사서선생님, 사회자는 어떻게 지원하는 거예요?”
“4학년이야? 지원 용지에 이름 적어서 사서쌤 주세요. 지원자가 많으면 추첨합니다.”
몇몇 선생님은 회장과 부회장이 하면 잘할 테고 편하지 않겠느냐 하시지만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지길 원했다. 말을 잘하는 학생이든 좀 부족한 학생이든 기회는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조건 지원자 중에서 제비뽑기로 했다. 이것도 어디서 보면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것까지 커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몇 번의 절차를 거쳐야 해서 내가 할 일이 더 많아지지만 내 나름대로 기회균등의 원칙을 지키고 싶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담임선생님들과 독후활동을 했고, 작가님이 오시는 날에 맞춰 시청각실에 작품을 전시했다. 아이들 질문도 미리 받아서 준비를 시켰고, 사회자들도 멘트를 준비해서 연습했다.
작가님이 아이들이 앉아있는 의자 사이로 난 길을 걸어 들어오셨다. 일제히 환호성이 이어졌고 작가님은 손과 눈, 몸짓으로 답례를 해주셨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망원렌즈가 있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참여했다. 시청각실 맨 뒤에 앉아있는 아이들까지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작가님은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시고 아이들은 깔깔 웃고, 소리를 지르고 반응이 아주 흡족했다. 무례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태도였다. 나는 그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작가님에게 질문한 아이들은 작가님 책을 선물로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책 들고 사진도 찰칵! 그 표정이 햇빛만큼 밝다.
작가님과의 만남이 끝나고 사인을 받을 시간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 책 선물을 받은 학생들만 사인을 받았다. 한 학년에 300명이 넘기에 전체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가님과 함께 단체 사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작가와의 만남은 끝이 났다.
작가와의 만남은 끝났지만 책에 대한 여운을 오래 남기고 싶었다. 아이들 표정이 담긴 사진과 현장 사진을 담은 포스터를 만들었다. 크게 뽑아 학교 게시판에 붙여 놓으면 지나가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들도 한참 포스터를 바라본다.
“야, 저기 내가 책 받은 사진 보이지?”
“뭐가 그리 좋아서 저렇게 웃냐? 어, 내 얼굴도 여기 있네. 히히 작가님 또 보고 싶다.”
자신의 모습을 찾으며 대화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미소를 띤다. 아이들의 웃음, 그것이 나에겐 행복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학교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예쁘다며 떼어서 시골집에 가져가셨다고 했다. 여러모로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행사가 작가와의 만남이었다.
그렇게 4년을 초등학교 사서교사로 지냈다. 초보 사서교사가 어느덧 경력직으로 바뀌고 있었다. 5년째 되는 해 중학교 사서교사 자리로 옮겼다. 초등과는 또 달랐다. 나의 수준은 초등에 머물러 있었는데 두려움과 막막함이 또 나를 찾아왔다. 중등에 가라고 꼬드기는 친구 말을 따랐다가 난처함도 함께 따라왔다.
1년이 지났고 지금도 적응 중이다. 겉으로 보기엔 잘 지내 보일 것이다. 맡은 바 임무는 꾸역꾸역 헤쳐나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직 나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음을 알고 있다.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용기가 조금 생겼다. 이제는 사서교사로서 우리 학생들과의 새로운 활동이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해나가면 되지 뭐.’ 이런 마음이다. 중학생들의 웃음에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