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출산기 10주 차
우리는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내는 요즘 체중 관리에 한창입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고른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탄수화물을 줄이고 과하게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곧 엄마가 되기에 '아직은'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원해서가 아닐 겁니다. 곧 엄마가 되지만, 그녀는 '영원히'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주중에는 다이어트식을 하고 주말이 되면 내가 해주는 요리를 기다리는 그녀가 좋습니다. 종종 우리가 좋아하는 이태원의 라멘을 먹는다거나 동네에 있는 평양냉면을 함께 할 때 우린 평범한 행복감을 누립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 둘 다, 소화가 안되고 화장실에 못 가는 입덧으로 고통받기는 하지만.
산펠레그리노 750ml 한 박스를 다시 채워 놓고, 네스프레소 캡슐을 가득 채워 두었습니다. 마치 주유를 가득하고 나면 부자가 된듯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작은 채워짐에 느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와인셀러 안에 이제 당분간 아내는 마실 수 없어 아쉬운 와인들이 가득하지만 몇 자리 남은 공간에는 탄산수 병을 채워 놓았습니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우유, 치즈와 야채가 가득합니다. 우리 부부는 과일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은 종종 딸기, 복숭아, 바나나, 참외를 사다가 채워두곤 합니다. 결국 다 못 먹을 땐 냉동해 두었다가 아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쯤 주스로 만들어 두면 나를 칭찬하곤 하지요.
임신의 안정기는 보통 12주가 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10주가 되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태아 검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12주 차에 병원에 방문하면 정밀 3D 초음파를 하게 되고, 두 가지 태아 검사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는군요. 일반 산전검사와 NIPT 검사가 있고 무엇을 선택해도 된다는 전제하에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12주 차에 방문해서 선택하면 된다고 했고, 나는 아내에게 꼭 NIPT 검사로 진행하자고 했습니다. 가격 측면에서 NIPT검사가 비용이 높았지만 고민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태아에게 무리가 가지 않고 더 높은 정확도가 있다는 장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산전 검사는 4주 정도 소요되는데 비해 10일 정도면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컸지요.
나에겐 아내의 안정감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 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내보다 더 소중한 건 없습니다. 그것이 곧 내 삶의 안정이며 내 삶의 행복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우리 가정을 위한 것이죠. 때문에 결정은 빠르고 간결했고, 아주 쉬웠습니다.
우리는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16주~17주쯤 되었을 때 가고자 해서 병원에 문의해보니 그쯤에는 긴 거리의 비행도 전혀 문제가 없고, 지나친 액티비티만 아니면 편안한 물놀이도 전혀 상관없다고 하네요. 우리 둘이 결혼 전부터 써왔던 오랜 여행용 트렁크를 버렸습니다. 새로운 트렁크에 새로운 여행의 설렘을 담아 떠나보려 합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우리 둘만의 여행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 여행이 단 둘이 떠나는 마지막 여행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설레고, 그래서 또 새롭습니다.
이번에 찾아온 딸기에게 감사해하며 몇 주간, 우리에게 안정기라는 게 언제쯤 오는 걸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많이 불안했고, 많이 숨겨야만 했고, 때론 혼자 숨죽여 아파했습니다. 이 시대에서 남편 따위의 아픔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요. 산모가 겪는 불안감과 아픔에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며, 때론 남자이기 때문에 불안해해서도 안되고 아파해서도 안된다는 종용이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너댓번째쯤 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많은 남편들이 홀로 외롭게 아파해야 할 때,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하는 이야기들. 그 감정들.
우리는 지금 여전히 불안하지만 놀라울 만큼 차분하며, 놀라울 만큼 지금을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정기라는 게 오긴 올까요? 아마도 그건 태아의 주 차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부부의 믿음과 더불어, 서로를 어루만지는 감정의 손길이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