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나는 늘 꿈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냥 병원 가서 보는 간호사 언니들이 너무 예뻐서 그랬던 것 같다. 조금 더 커서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조카들과 놀아주는 게 재밌었다. 자그마한 아이들은 울지 않고 꽤 나를 잘 따랐고 덕분에 어른들은 나를 이뻐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듯 으쓱했다.
중학교 때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치과에서 매일을 보내는 의사 선생님들이 대단해 보였고, 가장 중요한 건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나는 뼈 속까지 철저히 문과인 사람이었다. 당시 등교 전 보던 아침 뉴스가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그 사실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아나운서가 되기로 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아나운서 학원에 등록했다. 평소 목소리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는 내가 곧 아나운서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예쁘고 마르고 똑똑했다. 그곳에서 인생 처음으로 다이어트라는 걸 했다. 화면에 보이는 동글동글한 내 얼굴이 싫었다. 나는 스스로를 꽤 사랑하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내 목소리는 듣기에는 괜찮았지만 뉴스를 진행하기에는 턱없이 높은 톤이었다. 매일 붙잡고 하던 발성연습은 해도 해도 늘지 않았다. 자존감이 자꾸 낮아졌다. 그러다 대본 작성 수업 시간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아마 독서와 논술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던 엄마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어려서부터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부분이었다. 아, 그럼 이건가? 사실 칭찬받는 게 좋아서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글을 쓰는 게 좋았던 건지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게 글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누구나 한때는 자신이 크리스마스트리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히는 수많은 전구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 드라마 <직장의 신> 中
내가 본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대사였다. 그리고 그 충격은 생각지도 못한 공감과 인정과 슬픔에서 오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늘 꿈을 꾸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주변에 꽤 많은 친구들은 꿈이 없어서 좌절한다. 그들을 위로하다 보면 돌아오는 소리가 거의 이렇다. "좋겠다. 너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위로를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나는 늘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선택의 기준이 늘 그 꿈이 되었다. 꿈을 따라 과를 선택하고, 꿈을 따라 취미나 특기도 정해졌다. 꿈을 따라 방학 때 할 계획을 세우고, 꿈을 따라 사는 옷 마저 달라졌다. 심지어는 꿈을 따라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만큼 큰 공통점은 없으니까.
하지만 꿈이 내 세상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다.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고, 그 기회를 찾아 나서다 지쳐버리면 내가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라 그 지친다는 것조차 용납하지도, 되지도 않았다. 분명 내가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길을 잃고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했는지조차 흐릿해졌다. 내가 진심이었는지 의심하는 궁지까지 몰렸다. 꿈을 꾸다가 이루는 순간이 와도 마냥 즐겁지 않을 수 있다. 꿈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그 상상만으로도 이미 버겁다.
세상은 나에게 꿈을 꾸고, 갖고, 펼쳐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꿈에 대한 확신을 갖는 건지, 어떤 과정을 거쳐 꿈에 다가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꿈이 무너져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꿈을 꾸라고 말하면,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할 거야?
나는 꿈이 있기에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크리스마스트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꿈이 있었고, 많은 꿈을 꾸었던 동안에 나는 계속해서 좌절을 겪었다. 단순한 이유로 내 꿈이 시작되었어도, 그 꿈을 포기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꿈을 찾아 나선다는 것 역시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그 공백을 여행으로 메웠는데, 문제는 여행을 다녀오면 미뤄뒀던 문제가 고스란히 내 눈 앞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꾸역꾸역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했다.
꿈은 사람은 특별하게 만든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꿈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아니, 노력을 해도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노력은 숫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닌, 사람마다 다 다른 개성이니까.
그냥 궁금했다. 왜 아무도 나에게 꿈이 있는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건지. 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꿈을 꾸다가 좌절되면 좌절되는 대로, 새로운 꿈을 찾아 나서면 찾아 나서는 대로 다 괜찮냐고 물어주면서 왜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괜찮냐고 묻지 않는 걸까? 너는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좋겠다는 말 대신, 그럼에도 너는 괜찮으냐고. 꿈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것 역시 힘들겠다고. 네가 지금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냐고. 그렇게 물어봐주면 좋겠다.
"꿈이 있는 당신은 지금 어떤가요? 괜찮나요?"
ps. 사실 요즘 이 생각을 한다. 흥미와 재능은 같이 오는 게 아닐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늘 듣던 이야기고, 그 갈림길에 서길 두려워했다. 그런데 꼭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게임을 싫어한다. 내가 게임을 싫어하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 들어가 보니, 내가 게임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해도 늘지 않고, 매번 지기 때문에 도통 지속할만한 흥미를 찾지 못한 거다. 거꾸로 생각해보니, 잘하면 그만큼 재미가 있고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닐까? 내 꿈의 시작들이 대부분 칭찬에서 출발했던 걸 돌이켜보면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꾸는 꿈이라는 건, 잘하기 때문에 좋아졌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아닐까? 꿈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냥 응원하고 싶다. 세상에 모든 꿈이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당신의 꿈에 대해 의심하겠지만, 이런 가설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