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공허를 쇼핑으로 채울 수 있을까.
나는 청바지를 사랑한다.
-연청, 진청, 인디고, 그 중간의 어떤 색이 든.
-허리사이즈만 맞는다면 와이드나 슬림핏 모두.
-길이는 복숭아뼈 길이의 95cm부터 운동화를 덮는 103cm까지
-바지뿐 아니라 스커트 모자 재킷 에코백까지 데님으로 만든 것 을 다 좋아함
-유일하게 자제하기 힘든 품목
내가 좋아하는, 즐겨 사는 온라인 쇼핑몰의 세일 공지를 보았다.
친절하게 하루 전날 할인 품목을 알려준다.
구매하고 싶은 건 청바지 두 개.
수량이 적은 것으로 보아 구매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일 년에 한 번 안과 검진과 겹쳤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진료실 앞에 앉아 호명을 기다리며 10시 59분에서 11시로 넘어가는 순간 수월하게 한 개 성공, 연달아 다른 청바지까지 성공.
꿈인가?
하지만 여기서 안심하면 안 된다. 재고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결제 후 취소 문자가 오지 않는지 확인해야 하고, 상품준비 중에서 발송준비 중으로 바뀔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
결과는 모두 무사히 내 품에 안겼다. 사이즈도 디자인도 마음에 꼭 든다.
초등학교 6학년임에도 토이저러스를 좋아하고 레고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절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난 이번 세일이벤트의 승리자다.
절약을 도원결의 한 남편에게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명품도 아니고 사계절 내내 잘 입는 청바지인데 뭐. 필요한 소비였다고 생각하자.
약간의 죄책감을 모른 척 하니 기분이 좋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에이코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외로움에 익숙한 토니는 옷을 사랑하는 여자 에이코를 사랑하게 된다.
에이코와 결혼하며 누군가 곁에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다시 외로워질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 토니와 에이코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고 서로를 위해 주었지만 단 한 가지 에이코의 쇼핑중독이 문제가 되었다. 옷방이 꽉 차게 되자 토니는 에이코에게 쇼핑을 절제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야기했고, 에이코는 토니를 사랑하기에 노력한다. 하지만 샀던 옷을 환불하고 오는 길에 에이코는 죽고 토니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던 중 아내가 남긴 731벌의 옷을 보면서 신문에 구인광고를 낸다.
-신장 160cm
-신발 230mm
-size7
의 여성을 구함,
하는 일은 아내의 옷을 입고 토니의 사무실 비서로 일하는 것이다.
지원자 중 에이코와 가장 흡사한 미사코를 채용하기로 하고 옷방을 보여준다.
가난한 미사코는 이런 좋을 옷을 처음 본다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
토니는 불현듯 이 상황의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채용을 취소한다.
에이코에 대한 그리움이 흐릿해질 때까지 더 고독하게 산다.
토니의 절망과 고독, 상실은 늘 그 자리에 있다.
2004년 영화임에도 현대적이고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집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고, 그런 미장센이
그 어떤 대사보다도 토니의 삶을 잘 표현해 주었다.
토니 타키타니는 대사가 적고 영화 중간중간 여백이 많다.
여백에 나의 마음을 넣는다.
토니의 고독에, 에이코의 쇼핑 충동에, 미사코의 울음에 나의 청바지를 넣어본다.
고독과 상실로 점철된 토니의 삶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지만, 아마도 나의 청바지는 끊임없이 옷을 사던 에이코에 가까울 것이다.
옷장에는 이미 청바지가 차고 넘치게 많고, 택을 떼지 않은 청바지도 몇 개 있다.
쇼핑할 때의 마음만큼 그 내 손에 들어왔을 때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이제 청바지 쇼핑을 멈추려고 한다.
대신 옷장에 있는 청바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입고 다른 의미 있는 일들로 나의 고독과 상실을 채워가고 싶다.
약간은 부끄러운 나의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