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변압기 교체

전기 없는 이틀

by 봄밤


아이의 방학이 막 시작된 주말.

한 학기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다음 주부터는 느긋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주말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투덜거리며 야구팀을 걱정하면서 시작되는 주말.


하지만 우편함의 안내문을 읽는 순간 그것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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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30일 아파트 변압기 교체'


공사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다행히 밤에는 전기가 들어온다.

그럼 낮에는 어쩌지.

냉동실 음식들 괜찮을까.

변압기 공사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내 머릿속은 오직 냉장고뿐이었다.

사실 최근 냉동실이 꽉 차있음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빵이나 버터, 얼린 청양고추 같은 것이 툭툭 발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다고 뱉어내는 것처럼.


우선 버릴 것과 먹을 것을 분류했다.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떡들.

유통기한 몇 달 지난 냉동된 식빵. 얼려둔 버터.

다이어트 결심할 때마다 사는 닭가슴살.

하나 사면 제 가격이지만 다섯 개를 사면 50% 할인이었던 아이스크림.

컬리에서 사놓은 내 최애 피칸파이.

청양고추와 호랑이 밤콩.

스트레스받는 날 먹으려 했던 매운 닭발.

맛있는 빵집에 갈 때마다 다시 못 올 곳처럼 빵을 사고 얼려 두는 내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음식을 저장해 두고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장을 보지 않고 냉동실의 음식만으로도 잘 먹었다. 그동안 먹을 것이 없어 늘 온라인 마트를 뒤적이던 나였는데, 먹을 것이 차고 넘치게 많았다.


그렇게 냉장고를 비우고 청소를 시작했다.

이사하고 처음인 것 같다. 선반까지 빼서 닦고 말리고 다시 제자리에 넣고.

청소 과정은 힘들기는커녕 되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유난히 기억에 남은 순간이 있다.

모든 음식물을 다 꺼내어 바닥에 쌓아 두었던 그때. 그 순간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것들을 구입할 때는 제 각각의 이유가 있었고, 어떻게 먹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비싼 식재료도 있었고, 아끼던 디저트도 보였다.

어느 순간 먹으려고 했던 디저트들과 이제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보며 마치 내 머릿속 같았다.

많은 기억이 쌓여 왜곡된 기억이 생기고

유통기한이 지난 추억과 기억들을 모두 안고 있는 것.

생각은 많은데 얽히고설켜 처음의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없는 것.



걸 글로 쓰고 싶었는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하나 더 넣어두고 살고 있다.



변압기 교체 후에도 변함없이 식기세척기와 인덕션을 동시에 쓰면 주방 등이 깜박인다.

되도록이면 식세기 인덕션 건조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건 피한다. 구축아파트의 한계인가.

그래도 갑자기 정전이 된다거나 하는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 옆동네에선 변압기 고장으로 예고 없이 며칠씩 정전이 되기도 했다니까.



한여름에 변압기 교체는 나쁘지 만은 않았다.

학원 끝난 아이를 기다려 동네 도서관에 가고 매점에서 간단한 간식을 사 먹고 예정된 시간에 전기가 들어오질 않아 동네를 한번 더 돌고.

한여름밤의 추억과 더불어 냉장고 정리까지 했으니 말이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고생은 지나고 보면 좋은 추억이 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나와 닮았다.

빈 공간부터 만들자.

생각과 기억이 순환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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