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 사계절의 행복

무화과와 햅쌀

by 봄밤


"어릴 때 할머니댁 마당에 무화과나무가 있었어.

방학 때 할머니댁에 가면 질리도록 무화과를 먹었거든, 어찌나 잘 자라던지 사촌동생들이랑 실컷 따서 먹으면 이상하게 그다음 날 그만큼 또 열려있는 것 같았어. 방학 내내 질리도록 먹고 집에 왔다니까.

그런데 그때보다 이번 여름에 더 많이 먹은 것 같아."


남편이 말했다.


이번 여름 나는 오전 근무를 하는 날엔 꼭 무화과를 샀다.

온라인마트에서 산 무화과보다 일하는 마트에서 산 무화과가 훨씬 맛있다는 알게 된 후로는 더 자주 무화과를 샀다.

덥고 지치는 날도 무화과를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졌다.

바싹 구워 크림치즈를 얇게 바른 깜빠뉴 위에 올려먹기도 하고 샐러드에 넣어 먹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했다.

블루베리를 산 날엔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먹는 무화과와 블루베리로 그날의 고됨을 잊을 수 있었다.



지금 일하는 마트는 아이가 어릴 때 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어떤 요리보다 라면이 맛있다고 할 때부터 나는 주로 새벽에 문 앞에 도착해 있는 온라인 장보기를 이용했다. 지금도 여전히 온라인 장보기를 이용하지만 마트에서 일하고부터는 눈앞에 펼쳐진 채소와 과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오이와 양배추 단호박과 무화과를, 감자와 가지 같은 것을 부지런히 날랐다.

샤인머스캣 대신 씨가 있는 엷은 초록색의 진짜 청포도를 먹었다.

끈적임이 없는 단맛. 인공적인 단맛이 전혀 없는 수수한 단맛만이 입안에 남는 청포도.



10월이 되니 쌀 봉투에 없던 글씨가 더해져 있었다.



2025년의 햇빛을 듬뿍 먹고 자란 벼를 추수해 도정한 쌀.

고슬고슬한 식감의 밥을 좋아하는 아들 생각이 났다.

집에 쌀이 남아있지만 2kg의 백미를 사고야 만다.

평소에는 보리도 섞고 귀리도 섞지만 오늘만은 이 백미로 밥을 해야지 생각하며.

볶음밥을 먹고 싶다는 아들의 요청에 오늘은 꼭 그냥 밥을 먹어야 한다고 타이른다.


햅쌀로 한 밥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남편과 아들은 덤덤한 말투로 호응해 줄 뿐이지만 괜히 기분이 좋다.






마트에서 일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제철 식재료로 느낀다.

딸기와 데친 두릅, 냉이로 만든 양념장을 먹은 봄.

잠깐 맛볼 수 있는 산딸기와 블루베리를 만나 기뻤던 초 여름

무화과와 토마토, 오이와 가지, 단호박의 포실함으로 행복했던 한여름.

밤에 칼집을 내 군밤을 만들기도 하고 햅쌀로 고슬고슬한 밥을 지었던 가을.



딱 그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과일을 사고 아이가 부탁한 과자나 간식거리까지 완벽하게 장바구니에 담아 집에 오는 길엔 마트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군. 생각이 든다.




열두 달, 사계절의 작은 기쁨이다.






위 그림은 핀터레스트 이미지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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