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분노의 환불원정대

by 봄밤


당근 때문이다.

삼일 전 구입한 당근 세 개 중 한 개의 심지가 생각보다 굵어서.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썩은 건 아니지만 심지가 굵은 당근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

신선식품 반품은 하루. 따위의 규칙은 그녀의 분노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


또 어느 날은 우엉채 때문에 분노에 가득한 그녀를 마주한다.

일주일 전에 구입했고 유통기한이 하루 지났지만 절대 시큼한 냄새나 시들한 기운을 풍겨선 안 될 우엉채.

인간으로 치면 불로초를 먹은 듯 유통기한 따위 개의치 않고 신선했어야 할 우엉채는 상해버렸고, 환불규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 달려드는 그녀에겐 그 어떤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내가”로 시작하는 분노를 토해낸다.

“내가 어젯밤부터 화가 났는데”

“내가 이거 때문에 두 번 걸음을 했는데”

"내가 옆 마트에서 사 먹어 봤는데"

“어떻게 이런 걸 팔 수 있냐”


환불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아니 그러니까 내가”를 끊임없이 외치다가

끝에는 “내가 어디 가서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 로 끝을 맺는다.

약속이나 한 듯이.


최근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공무원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언성이 높고 거칠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가 가능하다면 악성민원인이 아니라고.

정말 그렇다.

처음엔 왜 저렇게 까지 화가 났을까 생각해 보고 또 이해하려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꽤 자주 오고, 장을 보고, 끊임없이 (상식밖의) 불만을 표출한다.

어느 날은 가격표의 위치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어느 날은 원하는 채소가 다 팔려서 화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불쾌한 감정을 빨리 지우는 것이다.

일희일비에 가까운 나에게 그들을 덤덤하게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훈련에 가깝다.

그리고 훈련이 성공하는 날엔 꽤 뿌듯하다.


며칠 전 감기로 들른 이비인후과에서 당근심지의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오래 기다렸다며 순서가 자꾸 밀린다고 항의하는 그녀.

어플로 예약한 사람이 먼저라는 설명이 들릴 리 없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첫 그림은 OpenClipart-Vectors님의 이미지 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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