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마트냐고요?
“팔꿈치 어느 부분이 아프세요?”
“팔꿈치 안쪽이요. 특히 힘줄 때 아파요.”
“갑자기 무리하셨나?”
“네 일을 시작해서요. 평소보다 무거운걸 많이 들었거든요.”
“무슨 일요?”
“마트에서 일하는데 처음이라 팔꿈치 무리가 되었나 봐요”
약간의 정적.
“그래 자식 있으면 뭘 못해. 엄마는 다하지. 아유 대단해요”
50대 후반의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더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셨고 마지막엔 압박붕대를 감아주며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세상이라지만 아줌마들의 세계란 이렇게 다정함 한 스푼 얹은 따뜻한 오지랖이 있다.
40대 중반에 마트일을 시작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좀 더 극대화된다.
먼저 말하지 않지만 굳이 숨기지도 않는 편인데
적당히 알고 지내는 지인과 안부를 나누던 중 마트일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순간
무슨 일 있나 하는 표정이 찰나를 스친다.
아무 일도 없다.
남편의 실직이나 월급에 변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적당한 일을 할 계획이었다.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있으면 약간의 도움이 될 만한 돈을 벌고 싶었다.
아이를 챙기며 내 일상을 크게 바꾸지 않아도 될만한 일.
러닝을 하는 남편이 두 개의 운동화를 두고 고민할 때
'하나는 내가 사줄게'라고 말하고 싶었고
어느 날 갑자기 오늘 월급날이라며 근사한 외식을 하고 싶었다.
매달 내 월급이 있다면 애틀랜타로 이민 간 친구에게 아이 수능 끝나면 꼭 한 번 가겠다는 약속이 좀 더 가까워질 것 같았다.
아이가 클수록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글쓰기에 몰입하는 시간보다 넷플릭스에 접속하는 시간이 많다는 걸 느꼈을 때 이젠 뭐라도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은 한가하고 어떤 날은 정신없이 바쁜, 다정한 손님과 글에서만 보던 진상 손님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일하다가 앞치마를 벗고 퇴근하는 순간 만족스럽게 혼자가 된다.
딱 내가 원한 적당한 소속감이다.
인생을 걸지 않아도 되고. 결과로 날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날 하루치의 성실함만을 사용하면 되는 마트일은 나에게 적당한 위로를 준다.
더불어 월급날에 느끼는 얕은 성취감까지.
이렇게 세 번째 계절을 보내고 있다.
하루 여섯 시간 일하고
하교 한 아이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다음 계절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