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확실한 사회생활

마트용 자아를 입고

by 봄밤




마트 안에서 인간관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동료들과의 관계.

또 하나는 손님과의 관계이다.



10년 만에 작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만의 ‘적당히’를 지키자고 다짐했다.

불편하고 싫은 감정이 들어라도 씨앗을 키우지 말자고.

마트에서 일할 땐 앞치마를 입는데 그와 동시에 마트용 자아를 입는다.

평소보다 가볍게, 전혀 쿨하지 못한 내가 쿨하게.


일을 안 하기로 소문난 동료와 짝이 될 때는 조금 더 일하고.

자기 자랑이 넘치는 동료와 짝이 되면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음이 맞는 동료와 일할 땐 커피나 작은 간식을 나눠먹으며 서로의 일을 덜어주려 먼저 움직인다.

좋거나 불편하거나, 나이차가 많이 나서 어려운 동료까지.

그저 무탈하게 여섯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을 통해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있지만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마트를 그만두면 만날 일이 없는 관계라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나아진다.





하지만 마음가짐을 강하게 해도, 마트용 자아를 입어도 뜻대로 안 되는 관계가 있다.

다정하고 늘 질문이 많고, 때론 괴팍하고, 억지도 부렸다가 다시 다정해지는.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잘 안 듣고

기다리는 건 싫어하지만 카드를 꺼내는 시간은 한없이 느린.

어르신 손님.



우리 마트는 어르신 손님이 많고 거의가 단골이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은 친근하게 안부를 나눈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의 요청이 있을 때 빼고는 먼저 말을 걸진 않는다.

어르신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마트에 온 귀여운 아기를 보고도 마음속으로만 ‘귀엽군’ 하고 넘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야기를 나눌 내공도 없고, 나의 마트용 자아는 남녀노소 모든 손님을 똑같이 대하고 있다

또 어르신들에게 몇 번의 폭언을 듣고 난 후에는 약간의 벽을 두었다.

마트용 자아를 입고 스스로를 지키며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어르신 손님의 그것은 무방비 상태에서 훅 들어온다.

아주 더운 날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가신다거나, 질문에 대답해 드렸을 뿐인데 감사하다고 연거푸 인사를 하실 때.

단골 어르신이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고 같은 물건 자주 사면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감자가 집에 많다고 먹어보라며 따뜻한 찐 감자를 건네주실 때.

어떤 감정보다 더 큰 울렁임이 생긴다.

그것은 연민이 더해져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그분들보다 젊어서, 늙음을 동정해서 느끼는 연민이 아니다.

마치 나의 엄마 같아서, 아빠 같아서, 또 미래의 나 같아서 마음이 울렁였고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계산이 끝난 물건을 잘 담아드리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드리는 것.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다.





젊었을 때의 나는 내 직업을 사랑했다.

열정이 가득했던 나의 사회생활은

너무 좋거나 너무 싫은 것들이 많았고 경솔하거나 조급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았고 쉽게 판단하고 움추러들었다.

전수의 형태로 배우는 집단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과 열패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웠고

그 안에서 중심을 잡기 어려웠던 것조차 나의 탓으로 돌렸다.




사랑하는 일만 했던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일을 한다.

사랑하는 일을 할 때의 열정은 없지만

나를 잃지 않고 '적당히'를 지키며

하루 여섯 시간 작은 사회생활은 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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