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언덕 위의 봄
《잿빛 나비》
8화. 언덕 위의 봄
마을 끝자락,
기찻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작은 언덕이 하나 나온다.
어릴 적, 은서와 서은은 그 언덕을 ‘작은 세상’이라 불렀다.
그곳에는 나무도 있었고, 풀도 있었고,
계절마다 색이 달라지는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세상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유일한 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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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은서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오늘은 그곳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조용히 외투를 챙기고,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햇살은 어제보다 조금 더 길게 늘어져 있었고,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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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은
마치 오래전 기억 속 장면을 다시 밟아가는 듯했다.
녹슨 철로 위에 낙엽이 내려앉았고,
오래된 경고 표지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언덕은 여전했다.
누군가 손질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은 천천히 그 자리를 회복하고 있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땅 밑에서 솟아오른 새순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가늘고 여린 생명들이, 바람에도 흔들리며 햇살을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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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천천히 그 언덕을 올랐다.
몇 번 숨을 골랐고, 가끔 발이 휘청였지만,
결국 넘어지지 않았다.
그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큰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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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섰을 때,
은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빛이 퍼졌고,
그 빛이 마른 풀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풀잎을 쓰다듬었다.
서은과 함께 누워 하늘을 보던 날이 떠올랐다.
“언니, 나중에 진짜 어른이 되면, 이 언덕을 사자.”
“왜?”
“우울할 때마다 여기 와서 누우려고.”
“그럼... 우리 우울할 때만 보겠네?”
“아니지. 나는 자주 올 거니까, 언니도 자주 올 거야.”
그 대화가 아직 바람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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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작은 꽃봉오리 하나를 발견했다.
연분홍빛, 아직 채 피지 못한 상태.
그 옆에는 이름 모를 작은 들풀이
햇살을 받아 초록빛을 내고 있었다.
서은이 있다면,
아마 가장 먼저 이 꽃들을 보며 웃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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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내려올 무렵,
은서는 조용히 속삭였다.
“서은아, 나 오늘 안 울었어.”
그 말은 바람에 실려
풀잎들을 따라 언덕 아래로 흘러갔다.
어쩌면 서은이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잘했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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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밤,
은서는 꿈에서 언덕 위를 다시 걸었다.
이번엔 서은이 옆에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은서에게 말했다.
“꽃이 곧 피겠지?”
그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꿈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