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말하지 못한 것들
《잿빛 나비》
9화. 말하지 못한 것들
은서는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천천히 식어가는 액체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건너편, 하진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차라리, 오래된 음악처럼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
밖에는 가벼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이 천천히 흘렀고,
그 사이로 흐릿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은서는 입을 열었다.
“가끔,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게 생겨.”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럴 땐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하게 돼.”
“왜?”
은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무너질까 봐.
딱 한 문장만 말하면,
나머지가 다 터져버릴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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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한텐 하나만 말해줄래?”
“응?”
“그 중에서... 가장 오래 가슴에 남아 있는 말.
단 하나.”
**
은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었다.
“미안해.”
그 말은 오래 닫혀 있던 문처럼 조심스레 열렸다.
목 안에서 울려 나오는 작은 떨림.
하진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한테?”
“서은이한테...
그리고 나한테.”
**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그 동의가,
은서에게는 울음보다 더 큰 소리로 들렸다.
**
카페를 나설 즈음,
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습기 머금은 공기 사이로,
벚나무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진은 우산을 들고 은서 옆에 섰다.
“같이 걸을래?”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우산 아래로 들어섰다.
**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비에 젖은 바닥, 봄기운이 묻은 풀 내음,
가끔 새어 나오는 웃음기 없는 숨소리.
하지만 그 모든 게,
이날만큼은 괜찮았다.
**
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하지 못한 것들은
언젠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에 닿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침묵을 같이 걸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그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