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피어나는 순간
《잿빛 나비》
15화. 피어나는 순간
공연 하루 전날 밤.
은서는 연습실 무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
은색 테이프로 표시된 동선 위를
발끝으로 조용히 더듬었다.
무대를 걷는 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마음의 집을
다시 찾아낸 사람처럼.
**
공연 당일 아침.
하늘은 연한 회색이었다.
비도, 햇살도 없었지만
은서는 오히려 그 무색함이 좋았다.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하진이 조용히 웃으며 건넨 건
한 송이의 조팝나무 꽃이었다.
작고, 가볍고, 바람에 잘 흔들리는 꽃.
“이거, 너랑 잘 어울려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은서는 꽃을 받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무대 뒤, 조명이 서서히 켜졌다.
출연자들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렀고,
객석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 조명이 은서를 향해 들어왔다.
**
무대 중앙에 선 순간,
은서는 서은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 언덕 위에서
서은이 말하던 그 한마디.
“언니, 나중에 우리…
세상 어디에서든 안 울고 살자.”
그 말이 오늘,
무대 위에서 다시 울렸다.
**
첫 대사는 짧았다.
“여기, 누군가 있었어요.”
그 말에 관객석은 고요했다.
은서는 천천히 다음 대사로 이어갔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진심이었다.
그 대사들 하나하나가
과거의 자신을 어루만지고,
서은의 자리를 껴안고,
지금의 은서를 완성해나갔다.
**
극의 끝, 마지막 장면.
은서는 천천히 무대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한 줄기 조명이 뒤에서 그녀를 비췄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여기에 있어요.”
그 한마디에
관객석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울음도, 숨죽임도, 모두 온기처럼 스며들었다.
**
막이 내렸다.
은서는 조명을 등지고 무대 뒤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대기실,
거울 앞에서 가만히 웃었다.
눈물이 흘렀지만,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
밖으로 나오자,
해가 구름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봄기운이 어깨를 스쳤고,
바람이 아주 조용히, 은서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
은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 아래,
서은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서은은 어디에도 없지만,
모든 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 자신 안에도.
**
그녀는 속삭였다.
“잘 봤지, 서은아?”
“이건… 내 이야기야.”
**
바람이 불었다.
잿빛 나비 한 마리가
멀리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날갯짓이,
은서의 눈동자에 작게 맺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렇게,
그녀의 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