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리허설
《잿빛 나비》
14화. 리허설
처음 며칠은 어색했다.
은서는 움직일 때마다 실수를 반복했고,
대사를 뱉으면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긴장하지 마세요.
연기는 잘하는 게 아니라, 살아보는 거예요.”
지도자의 말이 그나마 숨을 쉬게 해주었다.
무대 위에서
은서는 자꾸만 ‘정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답이 없었다.
있는 건 오직, 감정과 호흡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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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연기자들과 함께 대사를 맞추던 날.
은서는 상대 배우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목소리는 작았고, 시선은 자주 흔들렸다.
“지금 말하는 건 누구예요?”
지도자가 물었다.
“...극 중 인물요.”
은서가 대답했다.
“그 인물이 되려면, 그 사람처럼 숨 쉬고,
그 사람처럼 아파야 해요.
지금 은서 씨는, 그 인물이 되기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은 정확했다.
은서는 누군가가 되는 일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도 살아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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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은서는 연습실 한쪽에서 대본을 내려놓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내가 되려면, 서은아…
너 없이도 숨 쉴 수 있어야 하는 거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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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리허설 날,
은서는 조심스럽게 무대 중앙에 섰다.
대사 없이 걷는 장면.
딱 서너 걸음이면 끝나는 장면이었지만,
그 걸음 하나하나가 예전보다 달랐다.
눈을 들고, 관객석을 향해 바라봤다.
누구도 없지만, 누군가가 있다고 믿는 자세로.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었던 곳이에요.”
대사는 짧았고,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건 연기된 문장이 아니라,
삶에서 태어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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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이 끝나고,
하진이 무대 아래로 조용히 찾아왔다.
그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다른 눈이었어.”
“뭐가?”
“예전보다...
조금 더, 너 같았어.”
은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조명이 없었고,
박수도, 관객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무대란,
서은이 되고 싶은 곳이 아니라
나로 살아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