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원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믿었다.
소음이 가라앉고, 사람의 얼굴이 흐려지고,
하루의 사건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그런데 어떤 밤들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너무 가득 차서,
아무것도 더 담을 수 없을 것처럼 무겁다.
그런 밤에는 네가 내린다.
비처럼, 예고 없이.
창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내 안에서는 밤새 비가 온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 끝내 보내지 못한 메시지들,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들이
하나씩 물이 되어 떨어진다.
이별은 늘 끝난 뒤에야 시작되는 것 같다.
헤어질 때는 몰랐다.
정말 힘든 건 그 이후라는 걸.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살아가는 낮보다
괜히 조용해지는 밤이 더 잔인하다는 걸.
불을 끄고 누우면
괜찮아졌다고 믿었던 마음이 다시 젖는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루가
네 생각 하나로 쉽게 무너진다.
비가 그치면 모든 게 깨끗해질 줄 알았는데,
사실은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너를 잊으려고 애쓴 시간들마저
이 밤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잊었다고 말하는 건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너무 늦게 배운다.
창문을 닫아도 소리는 들어오고
눈을 감아도 기억은 열린다.
밤새 네가 내리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젖어간다.
우산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비를 맞는 사람이 된다.
이상하게도
그 밤이 지나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진다.
아픈 건 여전한데
견딜 수는 있게 된다.
아마 마음도 비를 맞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밤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네가 다시 내리는 밤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한다.
다 젖어도 괜찮다고,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 하나쯤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밤새 네가 내리고
아침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밤이 있었기에
내가 아직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