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언제나 이유를 요구한다.
타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몸을 내어주어야 하고,
그 대가로 세계는 잠시 연명한다.
사람들은 그 희생을 왕이라 부른다.
장작의 왕. 불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불이 된 자.
나는 그를 신화로만 알았다.
시대의 균열 속에서 태어나,
끝없는 어둠을 미루기 위해 선택된 존재.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이름은 점점 더 일상적인 단어처럼 느껴졌다.
왕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불을 붙들고 있었다.
장작의 왕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었다.
그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었으며,
꺼질 것들을 사랑했다.
다만 그는 불을 믿었다.
불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계속될 수 있다고,
밤은 다시 아침으로 돌아온다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장작으로 쪼개어
화로에 던졌다.
그 순간, 사람들은 환호했다.
세상이 다시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불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불은 따뜻하지 않았다.
안쪽으로 갈수록 그것은 고통도, 쾌락도 아닌
의무가 되었다.
살은 타들어 갔지만, 의지는 타지 않았다.
아니, 타지 않도록 강요당했다.
왕은 꺼질 수 없었다.
꺼지는 순간, 세계가 무너질 테니까.
그래서 그는 계속 타올랐다.
타는 것이 곧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고,
고통은 정체성이 되었다.
불꽃 속에서 그는 점점 자신을 잃었다.
이름이 먼저 사라졌고, 기억이 그다음이었다.
끝내 남은 것은 단 하나,
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때부터 그는 사람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장작의 왕을 바라보는 이들은 안도했다.
“아직 불은 살아 있다.”
그 말은 곧,
“아직 우리가 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통받는 동안, 세상은 평온했다.
왕은 위대해졌고, 그의 고통은 숭고해졌다.
숭고한 것은 질문받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가장 공포스러웠다.
고통이 미덕이 되는 순간,
누군가는 반드시 불 속에 남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자, 불은 약해졌다.
장작의 왕은 이미 재가 되었고,
더 태울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도, 뼈도 사라진 자리에서
오직 의무만이 연기처럼 남아 불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비명은 살아 있는 자의 언어였으니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이야기가 왜 낯설지 않은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작은 화로 앞에 서 있다.
가족을 위해, 일을 위해, 사랑을 위해,
혹은 이유 없는 책임을 위해.
불이 꺼지면 무언가 끝날 것 같아서,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씩 태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타는 것이 삶이라고 착각한다.
그때 우리는 장작의 왕이 된다.
왕관은 없고, 불꽃만 있다.
불은 결국 꺼진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 먼저 재가 되는가다.
장작의 왕은 세계를 위해 타올랐지만,
세계는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불이 꺼진 뒤에 남은 것은 폐허와 질문뿐이었다.
“정말 그럴 가치가 있었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이미 재였고, 불은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불을 믿지 않는다.
대신 어둠을 바라본다.
어둠은 적어도 거짓 약속을 하지 않는다.
어둠은 요구하지 않는다.
타오르라고, 견디라고,
대신해 죽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작의 왕이 남긴 마지막 교훈은 이것이다.
불을 살리는 것이 언제나 세계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 불을 끄는 용기야말로
진짜 인간에게만 허락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