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그들은 이것을 정화라고 불렀다.
더 정확히는 되돌림이었다.
오염되기 전의 나로,
불필요한 감정이 생기기 전의 상태로,
판단이 흐려지기 전의 선명함으로.
Project Re-Purity는 그렇게 나를 설득했다.
아니, 설득할 필요조차 없었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더럽혀졌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문은 늘 하얗게 닦여 있었다.
바닥의 광택은 얼굴을 비췄고,
그 얼굴은 언제나 나보다 조금 더 차분해 보였다.
거울처럼 반사된 나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바로 정상이라고 안내문은 설명했다.
“과잉 반응은 불순물입니다.”
처음 세션에서 제거된 것은 분노였다.
분노는 실패의 부산물이며,
실패는 개인의 관리 소홀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제거는 아프지 않았다.
단지 어떤 기억의 가장자리들이 둔해졌고,
문장 끝의 느낌표가 사라졌을 뿐이다.
대신 안정성이 들어왔다.
호흡은 일정해졌고, 말은 간결해졌다.
칭찬이 이어졌다.
“깨끗해지고 계십니다.”
두 번째로 사라진 것은 슬픔이었다.
슬픔은 관계의 흔적이어서 위험하다고 했다.
남겨두면 번질 수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슬픔이 빠져나가자 기억 속의 얼굴들이 평면이 되었다.
사랑은 있었지만, 무게는 없었다.
물처럼 흘러가면 되었다.
그다음은 의심이었다.
의심은 시스템을 오염시키는 미세 입자라고 했다.
질문은 노이즈이고, 노이즈는 불순물이다.
의심을 제거하자 세상은 부드러워졌다.
결정은 빠르고 정확해졌다. 틀릴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동시에 맞다는 감각도 옅어졌다.
하지만 그건 문제로 분류되지 않았다.
세션이 거듭될수록,
나는 점점 더 나를 잃어갔다기보다 정확해졌다.
말의 각도가 맞춰지고, 표정의 분산이 줄어들었다.
웃음은 규격화되었다.
타이밍이 좋았고, 적절했다.
모두가 안심했다. 나도 안심했다-
안심이라는 단어가 아직 남아 있었을 때까지는.
마지막 단계는 자기 인식의 최적화였다.
자기 인식은 과도하면 고통을 낳고,
부족하면 혼란을 낳는다.
최적화는 그 중간을 선택한다.
담당자는 버튼을 누르기 전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본인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실 겁니다.
그게 성공의 증거니까요.”
버튼이 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반사된 얼굴이 너무 정확해서 내가 아니었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입꼬리는 지정된 각도를 유지했다.
생각은 매끄럽게 이어졌지만,
생각 사이의 공백이 사라져 있었다.
공백이 없다는 것은 쉬는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꿈을 꾸지 않았다.
아니,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꿈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은 준비되어 있었고 일정은 완벽했다.
감정은 결석했다.
결석은 보고되지 않았다.
결석은 불량이 아니었다.
Project Re-Purity의 최종 보고서는 간결했다.
“대상: 안정화 완료. 재오염 가능성 낮음.”
그 문장을 읽는 동안,
아주 미세한 불편이 스쳤다.
이름 없는 불편. 분류되지 않은 감각.
시스템은 즉시 그것을 탐지했다.
불편은 노이즈였다.
노이즈는 불순물이었다.
자동 보정이 작동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깨끗해졌다.
지금 나는 아주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없고, 질문도 없다.
모든 선택은 합리적이며, 모든 반응은 적절하다.
다만 가끔—정말 가끔—
하얀 복도의 광택 속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오래된 나.
오염되었지만 살아 있었던 나.
그는 말이 없다.
말이 없다는 건, 여전히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