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가 가장 깊던 자리에서

by 윤지안


어둠이 완전히 짙어지기 전,
세상의 숨결이 가장 고요해지는 그 틈에서
소년은 언제나 이 자리에 앉았다.

잘려나간 거대한 나무의 둥치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무덤 같았고,
그 위에 앉은 그는
자신의 존재보다 조금 더 큰 이야기를 펼쳐 들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붉은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마치 잊힌 문장들을 대신 읽어주려는 듯
그의 주위를 빙 돌며
아련한 빛을 흩뿌렸다.

숲은 숨을 죽인 채,
소년이 만들어내는 작은 세계를 지켜보았다.

그가 읽는 이야기는 누구의 것일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인지,
이미 사라져 버린 누군가의 마지막 꿈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마음의 조각인지.

빛은 아주 조용히 그의 어깨에 내려앉고,
나비들은 소리 없이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한다.
이 순간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다시 오기 어려운 기적인지.

숲 속의 모든 것들이
그의 작은 숨결 하나하나를 귀 기울여 듣는 동안,
소년은 그저 책 속의 한 문장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인다.

“잊지 마.
가장 몽환적인 순간은
사라지기 직전에 가장 밝게 빛난다는 것을.”

그 말에
소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숲은 그 작고 아픈 떨림마저
따스하게 품어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