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남겨 둔 침묵

by 윤지안


라니꽃은 처음부터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겹겹이 접힌 침묵으로 다가와,
시간을 천천히 풀어 보라고 손짓한다.

한 장 한 장의 꽃잎은 급하지 않다.
서둘러 피었다가 사라지기보다,
머뭇거리며 자신을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라니꽃 앞에서 늘 속도를 낮춘다.

빛을 받으면
꽃잎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결심과 망설임의 중간쯤에 있다.
단단해 보이지만 쉽게 상처받고,
연약해 보이지만 오래 버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는 걸
라니꽃은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라니꽃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견디는 일의 형태가 떠오른다.
소리 없이 겹쳐지는 날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층을 이루며 살아남는 방식.
우리는 종종 활짝 핀 순간만을 기억하지만,
사실 가장 많은 이야기는 피기 직전의 정지 속에 있다.
라니꽃은 그 정지를 아름답게 보존한다.

그래서 이 꽃을 좋아한다.
화려함으로 나를 설득하지 않고,
조용함으로 오래 머물게 하니까.
라니꽃이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여백이 남는다.
그 여백 덕분에 나는 오늘의 마음을 내려놓고,
내일의 마음을 살짝 접어둘 수 있다.
꽃잎 사이에 숨겨 두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