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씨의 이야기
− 구대리, 자네 사정 딱한 건 알지만 과장님께서 잔뜩 화나셨어. 어제까지가 보고서 기한이었잖나. 오늘 경위서 쓰고 보고서는 오전 중으로 제출하도록.
자리에 돌아온 구씨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서류철 위에 얹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머릿속에는 어제 응급실의 빛과 냄새가 겹쳐 들어왔다. 늙은 의사의 푸석한 머리칼, 코끝을 찌르는 소독 냄새. 동생이 차에 치였다는 말은 여전히 가슴속을 맴돌았다.
− 다행히 큰일은 아니에요. 타박상 정도랍니다.
생활지도원의 담담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큰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구씨에게 동생은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존재였다. 부모가 떠난 뒤, 중증 자폐의 동생을 돌보는 일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되었다. 그 책임은 짐처럼 어깨를 짓눌렀고, 그림자처럼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경위서 첫 줄을 쓰려는데, 익숙한 그림자가 책상 위를 드리웠다.
− 어제오늘 계속 고생하네, 구대리님.
김비서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 비서실에 들어온 선물인데, 드시면서 해요.
구씨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피로에 짓눌린 하얀 얼굴에, 순간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구씨는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녀의 미소가 특별하다고 느끼곤 했다. 상자를 열자 감자떡이 들어 있었다. 순간, 라벤더밭의 보랏빛 향기, 유바리 멜론의 달콤함, 호텔 창가에서 스며들던 햇살이 불쑥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말.
− 당신은 이모모치 같아.
뒷목이 날카롭게 저렸다. 순간, 그 치사한 말이 자기 입에서 흘러나왔던 아침이 떠올랐다. 가장 초라한 방식으로, 가장 쉽게 등을 돌린 기억. 그 말은 상대를 겨눈 게 아니라, 결국 자기 비루함을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구씨는 떡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 별로 생각 없습니다. 갖고 가주세요.
김비서의 표정에 잠시 무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떡을 책상 위에 놓고 조용히 돌아갔다. 구씨는 감자떡을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문 순간, 익숙한 단맛이 입안에 번졌다. 그는 씹다 만 떡을 휴지에 감싸 쓰레기통에 던졌다. 탁, 탁, 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은 단단히 굳어졌다. 그날처럼, 지금도 그는 달콤함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모니터 아래쪽에 노란 알림창이 깜빡였다. ‘가족돌봄 휴가 신청’ 안내 팝업. 구씨는 커서를 신청 버튼 위에 올려놓고, 한 번, 두 번, 벗겨진 마우스를 쓸어내렸다. 버려진 감자떡의 달큰한 냄새가 희미하게 퍼지며, 오래된 기억을 하나둘 깨웠다.
초등학교 운동회 아침, 집안은 이른 시간부터 부산스러웠다. 부엌에서는 갓 지은 밥 냄새에 참기름 향이 퍼졌고, 마당에서는 이웃집 아이들이 흰 운동화를 질끈 매며 뛰어다녔다. 창밖 햇볕에 흙먼지가 반짝이고 뜨거운 열기가 운동장 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 한쪽에서 김밥을 돌돌 말며 말했다.
− 우리 집 첫째, 오늘은 네 트랙만 보고 끝까지 달려. 넘어져도 괜찮은 거 알지?
‘첫째’
그 말에 구씨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아닌 ‘첫째’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자꾸 이름 대신 첫째라고 할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그냥 괜히 심술이 돋아 밥풀이 목에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는 동생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 상은 못 받아도 괜찮아. 반 대표로 계주 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구씨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은 자꾸 다른 생각으로 달아났다. 오늘은 내 이름이 운동장에서 크게 불렸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 눈이 잠깐이라도 나한테만 머물렀으면.
하지만 식탁 건너편에서 동생이 숟가락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를 냈다. 엄마는 얼른 반찬을 바꿔주었고, 아빠는 낮은 목소리로 동생을 달랬다. 방금까지 자기 쪽을 향하던 관심이 금세 사라진 듯해 구씨는 말없이 김밥을 씹었다.
운동장은 축제처럼 떠들썩했다. 돗자리 위에는 도시락이 펼쳐지고, 확성기에서는 안내 방송이 쏟아졌다. 흙먼지 위로 햇살이 반짝였고, 아이들의 흰 운동복은 바람에 펄럭였다. 계주 출발선에 서자 손바닥 밑으로 뜨거운 흙이 전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번만은 꼭 내 이름이 운동장에서 크게 불렸으면 좋겠다. 그 마음이 온몸에 꽉 찼다.
‘탕!’ 총성이 울리자 아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튀어나갔다. 발뒤꿈치에 흙이 튀었고,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순간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했다. 그런데 첫 코너를 돌던 순간, 관중석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동생의 목소리였다.
다리가 굳어 서 버렸다. 옆라인 선수가 팔꿈치를 스치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관중석에서는 “달려!” “끝까지!”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구씨의 시선은 이미 동생에게로 쏠려 있었다. 발걸음은 결승선이 아니라 관중석 쪽으로 향했다. 잠시 뒤, 체육선생님은 구씨 이름 옆에 빨간 보드마카로 ‘기권’을 적었다. 그 굵고 선명한 글씨가 어린 구씨의 눈에 콕 박혔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결승선 앞에서 돌아선 이 선택이 이후 삶에서도 습관처럼 반복될 거라는 사실을.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언제나 결승선을 등진 채 이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봄, 교환학생 합격 메일을 받았지만 답장은 끝내 보내지 못했다. 새벽 현관에 말끔히 풀린 자신의 운동화 끈이 그를 멈추게 했다. 첫 직장 발표 자리에서도 같았다. ‘NEXT STEP’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오른 순간, 동생의 전화에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사랑했던 사람도 오래 곁에 두지 못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줄만 남겼다.
− 네 삶의 무게를 끝내 함께 나누지 못해, 미안해.
눈앞에 새로운 길이 열릴 때마다 그는 번번이 어깨 위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구씨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며칠 휴가를 냈다.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계산대 앞에서 동생이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 “에에—! 에에—!” 찢어지는 소리가 매장 안을 가득 메우자, 형광등 불빛마저 흔들리며 공간이 요동치는 듯했다.
사람들은 카트를 뒤로 물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 저 사람, 뭐야...?
− 장애 있는 거 아냐?
몇몇 아줌마들은 줄에서 물러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구씨는 순간 멈칫했다. 예전 같으면 엄마가 먼저 다가가 동생을 끌어안고, 사람들 앞을 가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역할을 자신이 대신해야 했다. 그는 카트를 밀쳐두고 동생 곁에 쪼그려 앉았다.
− 괜찮아, 곧 끝나. 나랑 같이 숨 쉬자.
그는 동생의 손 위에 자기 손을 덧대 귀를 감싸 쥐었다. 따뜻한 손길에 동생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부모가 떠난 뒤, 집안의 가구들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집의 무게는 달라졌다. 장롱은 더 무겁게 느껴졌고, 싱크대 문짝은 예전보다 천천히 닫혔다. 그는 동생의 약 봉투를 날짜별로 나눠 투명 지퍼백에 넣었고, 밤마다 알람을 세 개씩 맞췄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거울 속 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현관 앞에 서자 자동센서 등이 켜졌다. 문이 열리자, 동생이 복도 끝에서 양손을 퍼덕이며 흔들었다. 정해진 순서였다.
현미밥을 데우고 버터를 반 숟가락 긁어 넣은 뒤, 간장을 세 방울 떨어뜨렸다. 뜨거운 밥 위에 잘라 올린 김을 보자, 동생은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그릇 벽을 긁는 소리가 일정해지자, 그제야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사무실 서랍에 버린 감자떡이 다시 떠올랐다. 달콤한 건 늘 쉽게 삼켜지지만 그래서 더 오래 겁이 났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24시간 장애인 보호시설, 자폐 성인 보호시설’ 같은 단어를 적어 넣었다. 후보가 될 만한 곳들을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집의 하중이 분산되며, 그의 어깨에는 한결 가벼운 집이 내려앉았다. 그는 어깨를 고쳐 세우고, 조심스레 균형을 잡았다.
다섯 편 가운데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