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모치 3

여행자들

by 윤사과

며칠 뒤, 동료 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가벼운 문장으로 대중의 사랑을 얻는다고 깔보던 사람이었다. 그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 집 안의 책더미가 숨통을 조여왔다.


나는 무작정 가장 빠르게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를 샀다. 삿포로. 공항 대합실에는 여행객들의 웃음과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그 활기는 내 안에서 죽어버린 열정과 대비되어 더욱 씁쓸하게 다가왔다.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앞 의자에 앉자, 출간 소식을 알렸던 카카오톡 대화방들이 머릿속으로 소환되었다. 그때는 수십 개의 축하가 쏟아졌는데, 지금은 단 한 줄의 안부조차 오지 않았다. 알림이 꺼진 휴대폰이 한없이 무거웠다.


삿포로 공항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공기가 들이마신 숨을 가득 채웠다. 서울보다 더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낯설어서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서울의 책더미와 전화벨에서 멀어진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결 숨이 가벼워졌다.


처음 며칠은 호텔방에 틀어박혀 NHK 채널을 켜둔 채 잠만 잤다. 화면 속에서 일본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이 번갈아 흘러나왔지만, 알 수 없는 소리들은 내게 파도처럼 스쳐가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일까. 거리로 나와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은 읽을 수 없었고, 사진만 가리키며 주문했다. 국과 밥이 나오자 허겁지겁 삼켰다. 위가 뜨거운 음식으로 채워지는 순간, 그제야 살아 있다는 감각이 조금 돌아왔다.


호텔 로비로 돌아왔을 때, 카운터 한쪽 선반에 놓인 비에이(홋카이도의 작은 마을) 투어 팸플릿이 눈길을 붙잡았다. 보랏빛 라벤더 밭이 끝없이 이어진 사진이었다. 집필하던 시절,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라벤더 향초를 켜 두곤 했다. 잠시나마 위안을 주던 향기였다. 인공의 향이 아닌, 살아 있는 향기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직원에게 다가가 예약을 부탁했다.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비에이 투어 버스. 사람들로 가득 찬 차 안에 단 하나 남은 자리. 내 옆에 앉은 건, 하얀 얼굴의 삼십대 초반쯤 되는 남자였다. 나는 그냥 구씨라고 부른다. 꾸벅꾸벅 졸다 희미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 휴게소 도착이라네요, 잠깐 내릴게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옆으로 치우고 다시 잠이 들었다. 돌아온 구씨는 손에 종이 포장지를 쥐고 있었다.

− 감자떡이에요. 드셔보실래요?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한입 베어 물자 쫀득한 반죽과 달콤짭조름한 간장이 퍼졌다. 그 맛은 책상 앞에서 떡으로 하루를 버티던 기억을 불러냈다. 호주에서 자랄 땐 떡이 귀했다. 남들은 케이크에 촛불을 꽂았지만, 내 생일상에는 엄마가 쪄낸 백설기나 손수 빚은 송편이 올랐다. 그걸 씹는 순간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감각이 살아났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도 원고 앞에 앉으면 떡부터 찾곤 했다. 그중에서도 감자떡을 가장 좋아했다.


감자떡은 반투명하게 비치는 회색빛 반죽에 감자 알갱이가 살아 있어 투박한 맛이다. 씹을수록 팥소의 단맛이 은은하게 퍼지고, 숨은 쫀득함이 혀끝에 감긴다. 그런데 지금, 낯선 남자의 손에서 건네받은 감자떡은 전혀 달랐다. 부드럽게 늘어지는 떡을 베어 물자 달짝지근한 간장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피로가 사르르 풀리듯 몸이 느슨해졌다.


− 저는 떡 별로 안 좋아해요. 감자떡도 역시나 별로네요. 이것도 드실래요?

그가 마지막 감자떡을 건넨 순간, 무채색 같던 여행길이 따뜻한 파스텔톤으로 물들었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원래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환불도 안 되는 비행기표가 아까워 억지로 왔는데, 막상 혼자가 되자 뜻밖에도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창밖의 낯선 풍경에 시선이 꽂힌 채 웃으며 말했다.

− 사실 일본 여행은 처음이에요. 떡을 먹으니까 여기가 일본이네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한국 생각이 나요.

− 저도 처음이에요. 떡은 여전히 별로인데, 이 공간이 주는 묘한 느낌은... 싫지 않네요.


팜도미타 농장의 라벤더 밭. 보랏빛 물결이 바람에 흔들리며 향기를 흩뿌렸다. 라벤더 향이 바람에 실려 퍼지자, 순간 세상은 고요해지고 유키 구라모토의 〈Lake Louise〉가 보이지 않는 배경음악처럼 우리를 감쌌다. 고요해진 세상 속에서 구씨가 거인처럼 커졌다. 우리는 유바리 멜론을 나눠 먹으며 웃었다. 이윽고 라벤더 향에 취한 듯 그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 살면서 이렇게 자유로운 건 처음이에요.


그는 자폐를 가진 남동생 이야기,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삶의 무게, 그리고 벗어나고 싶었던 욕망을 털어놓았다. 담담히 말했지만 그 눈빛은 한없이 무거웠다.


비에이에서 돌아온 저녁, 버스는 삿포로 역으로 사람들을 쏟아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 캐리어 지퍼를 여닫는 소리, 눅눅한 공기가 한꺼번에 엉켰다. 오도리 공원 너머로 아직 조금 밝은 하늘이 남아 있었다. 숙소에 가까운 스스키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네온이 물속 글자처럼 흔들리며 번져왔다. 우리는 말없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렸다. ‘삐— 삐—’ 건널목 소리가 새소리처럼 울렸다.


편의점에서 물 두 병을 샀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처럼 조금 비현실적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내 원피스 자락엔 낮의 라벤더 향이 옅게 묻어 있었다.


방은 좁고 단정했다. 침대 위 하얀 이불에 재킷을 벗어 올리자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주전자의 스위치를 내리자 철컥, 금속음이 울렸고 곧 물 끓는 소리가 낮게 방을 채웠다. 커튼 사이로 새어든 네온빛은 파란 잉크처럼 벽을 물들이며 흔들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유리창을 조금 열었다. 바깥의 소음이 흘러들어왔지만, 방 안은 더 고요해졌다. 숨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움직임만을 의식했다.

− 밖은 시끄러운데, 여긴 너무 조용하네요.

나는 티백을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피어오르며 종이 라벨이 허공에서 작은 진자처럼 흔들렸다. 그는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 조금 쓰네요.

− 설탕은 넣지 않았어요.

괜히 한 말 같아, 스스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아닌 말에 뜻밖의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는 침대 끝에 앉아 여행 가방에서 영수증과 티켓을 꺼내 한 장씩 접었다. 얇은 종이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손끝이 잠시 머뭇거렸다. 벽 쪽에 차곡히 쌓여 가는 종이더미가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호텔 슬리퍼를 신고 창가로 걸었다. 까슬한 바닥 감촉이 발바닥에 닿았다.


우리는 오후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라벤더 밭의 바람, 멜론의 당도, 가이드의 농담.

−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도 모르는 얼굴로 걸을 수 있어 좋아요.

그가 말을 마치자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손등에 짧게 긁힌 자국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보랏빛 라벤더 물결 너머로 드러난 그의 옆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는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숙여 낮게 속삭였다.

− 내가 이렇게 웃었네요.

말이 끊기자 방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골목 라면집에서 퍼져 나온 국물 냄새가 희미하게 번져왔다.

− 라면 먹을래요?

내가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은... 배가 안 고파요.

그는 의자 끝에 아슬하게 걸터앉아, 가늘고 창백한 팔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 동작은 위로인지 습관인지 모를, 어딘가 서성이는 몸짓처럼 보였다. 이어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길을 잃다 내 어깨 근처에 멈췄고,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불을 끄자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천장 위 화재감지기의 빨간 불빛이 점처럼 깜빡였다. 에어컨이 낮게 웅웅거렸다. 잠시 뒤, 복도 끝에서 얼음이 ‘톡’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긴 내 삶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잠깐 살만해요.

말을 끝낸 그는 살짝 웃었다. 어둠 속 그 웃음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놀랄 만큼 차가웠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밤이었다.


아침,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침대 끝에 앉은 그의 눈동자는 어제와 달리 텅 비어 있었다.

− 당신은 ‘이모모치’ 같네요.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곧 떠났다. 호텔로 옷을 가지러 간다고 했다.


검색창에 ‘이모모치’를 쳤다.

이모모치. 일본식 감자떡.


그날 이후 감자떡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이제 가장 좋아하는 건 호박떡이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터져버린 호박떡을 긁어모아 그릇에 담는다. 질척한 잔해를 삼키자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 역시, 맛있네.




다섯 편 가운데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평온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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