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사랑이 내게 준 것
고속버스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와, 나는 하늘에서 공중제비를 돌다 바닥에 퍽 하고 고꾸라졌다. 하늘을 나는 그 짧은 순간,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성윤아, 글쎄 작은할아버지 말이야. 어제 뉴스에 나온 버스 전복 사고 있지? 거기 타고 계셨대. 세상에나. 다행히 안전벨트 하고 계셔서 타박상만 입으셨다더라. 너도 꼭 안.전.벨.트. 매도록 해.”
엄마 말을 들을걸. 그래도 참, 내 인생은 나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랑해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 나는 마지막 말을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연극이 끝난 뒤 조명이 꺼지듯,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어나 볼래요?”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맑은데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눈을 뜨자, 나는 병원도 도로도 아닌 곳에 서 있었다. 안개가 허리춤까지 차올라 있고, 바닥과 천장이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됐다.
눈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연회색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무릎 아래까지 코트 자락이 내려온 젊은 남자. 스물 후반에서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나는 입술만 겨우 움직였다. 남자는 모자챙을 윗손가락으로 쓸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긴 중간세계예요.”
“중간...세계요?”
“네. 이승과 저승 사이. 일반적으로는 잠깐, 경우에 따라서는 오래 머무는 곳이지요.”
그는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저... 죽은 건가요?”
남자는 대답 대신 한동안 나를 지그시 보다가 말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지요. 당신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날 따라오세요.”
나는 위아래조차 구분되지 않는 낯선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제 손을 잡으세요. 이곳에선 제 손을 잡고 움직이는 게 안전할 거예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내 검지를 살짝 긁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중간세계에서는 이런 기묘한 감정도 마치 일상의 일부처럼 금세 사라졌다.
“이곳의 안내자입니다. 여기에 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선택을 알려주는 사람이지요.”
“선택...?”
“네. 다음 생으로 갈지, 아니면 살던 세계로 돌아갈지를요.”
가슴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이 일어났다. 다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도 있다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돌아갈 수도 있어요...?”
“네. 다만 그대로는 못 돌아가죠.”
그는 내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그의 엄지손톱이 내 검지손가락을 다시 사르르 긁었다. 낯선데... 이상하게 익숙하고 편안했다.
“걸으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갯속을 걷기 시작했다. 걷는 만큼 발밑에 길이 생기는 듯했다. 길을 따라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 조용히 울고 있는 이, 미묘하게 웃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은 채 미동도 없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저 사람들도... 저처럼 사고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남아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다시 태어나기 싫어 머무는 이도 있죠. 그냥... 아직 아무것도 선택할 용기가 없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어요.”
“계속 머물러도 돼요?”
“한동안은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는 아니에요. 이곳에도 시간이 있거든요.”
“시간...?”
그가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구슬들이 떠 있었다. 유리구슬처럼 둥근데 색이 계속 바뀌었다. 푸른빛, 복숭아빛, 저녁노을빛, 다양한 색깔들의 구슬들이 영롱하게 빛나며 어두운 중간세계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이루었다. 어찌 보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도 같았다.
“저건 뭐예요?”
“기억의 구슬.”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머리로만 떠올린 기억은 여기 오지 못해요. 가슴에 남은 것만 이렇게 구슬이 되죠. 크기가 클수록 더 깊이 간직한 가슴속 기억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제 것도... 있어요?”
“그럼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꽤 많아요.”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 구슬들을 본 뒤 선택하게 될 겁니다. 다음 생으로 갈지, 아니면 사고 이후의 몸으로 돌아갈지.”
“사고 이후의... 몸...?”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간... 예전처럼 두 다리로 설 수는 없어요. 사고 충격이 너무 커서 하반신은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럼... 다음 생은...?”
“모든 걸 잊고 새로 태어나는 거죠.”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아빠, 친구들 이름... 모두.”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게다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열 해뿐이에요. 열 해가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거든요.
아무리 깊은 슬픔도, 사랑도... 열 해면 닳아 없어져요.”
나는 잠시 숨이 멎은 듯했다.
“사라지는 건... 죽는 건가요?”
“이미 한 번 죽었잖아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소멸되는 거죠. 다음 생도, 기억도, 모든 것이.”
그 말이 차가운 바람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이제, 당신 기억을 보죠.”
나는 가장 크게 빛나는 구슬에 손을 뻗어 닿았다. 손끝이 스치자 구슬이 살아 있는 듯 떨리며 눈앞에 나의 기억들이 펼쳐졌다.
병원.
수술복.
형광등.
아주 작은 내가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간 이식.
그리고 이식해 준 사람은—아빠였다.
복도에서 할아버지의 고함이 터졌다.
“니 정신 있나! 간이 약한 집안인 거 모르나! 니까지 쓰러지면 어쩌려고!”
엄마는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었다. 아빠는 마취 직전까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윤아,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그리고 장면이 구슬과 함께 조각나 사라졌다.
아빠에게 간이식을 받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었다. 너무 놀라 한동안 몸이 굳어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남자가 말했다.
“머리로는 몰랐겠지만 가슴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운동회마다 허리가 아프다면 달리기를 하지 않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고, 괜한 경쟁심으로 친구 아빠들과 수없이 비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아빠에게 사무치게 미안해졌다.
다음 구슬에 손을 갖다 댔다.
어린 시절 나를 돌봐주던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 장례식. 어린 나는 영정사진 앞에서 아주 크게 울고 있었다. 십 년 가까이 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그 기억이 이렇게 깊이 남아 있었다니—스스로도 놀라웠다.
수많은 구슬을 보았다.
엄마가 울던 밤.
아빠가 피곤한 눈으로 숙제 봐주던 새벽.
친구들의 웃음.
그리고 내가 몰랐던 작은 사랑들.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면 모든 걸 잊어야 한다. 돌아가면 걷지 못한다.
그때였다.
남자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어깨선이 흐려지고 있었다.
“잠깐만요... 왜 그래요?”
그는 모자챙을 만지며 가볍게 말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소멸되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지 열 해가 됐죠.”
“왜요... 왜 그렇게 오래 머무셨어요...?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누구를...?”
그는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다.
“성윤아. 우리 강아지.”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익숙한 억양과 어딘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냄새가 순식간에 나를 감쌌다. 잊고 있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증조할머니와 손을 잡고 다니던 시절. 할머니는 습관처럼 당신의 엄지손가락으로 내 검지를 긁어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해사하게 웃었고, 증조할머니는 그런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잠깐... 잠깐만요... 증조할머니예요?”
나는 사라져 가는 남자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고 외쳤다. 그러자 젊은 남자의 얼굴이 증조할머니의 얼굴로 변했다. 할머니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성윤이, 이제 알아보네.”
“왜... 왜 이런 모습이에요...?”
“여긴 마음이 먼저거든.”
할머니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제일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은 얼굴로 지낼 수 있게 되더구나.”
나는 사진 속 젊은 증조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얼굴은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얼굴이었다. 유복자인 할아버지를 홀로 키우며, 할머니는 평생을 증조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증조할아버지의 모습... 내가 본 그 안내인의 얼굴은 바로 그때의 모습이었을까.
증조할머니는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올까 봐. 여기 와 네 운명을 알게 되니 떠날 수가 없더라. 우리 손녀 겁먹지 않게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할머니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열 해면 사라진다고 했잖아요...”
나는 울먹였다.
“그 열 해를... 절 기다리느라 쓴 거예요?”
“그래도 괜찮다. 꼭 성윤이를 보고 가고 싶었거든.”
사라져 가는 손으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성윤아.”
할머니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또렷해졌다.
“다음 생을 가든, 돌아가든...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할머니... 왜 그랬어요. 바보같이... 할머니 다시 태어나면 남편이랑 백년해로하고 싶다면서... 왜 그랬어요.”
내 말은 흐트러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우리 손녀.”
할머니는 거의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렇게 예쁘게 커 줘서... 나는 하나도 안 슬프다. 고맙다.”
그리고 빛처럼, 안개처럼 할머니는 사라졌다.
내 앞에는 두 개의 길만 남았다.
다음 생. 혹은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이번 생.
나는 눈을 감았다. 구슬들 속에서 꽉 찼던 사랑의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은 나의 다짐이자, 증조할머니에게 바치는 굳건한 마음의 헌정이었다.
“한 번 더... 살아볼게요.”
눈을 뜨자 형광등 불빛이 눈부셨다. 소독약 냄새, 기계 음, 울음이 섞인 사람들 목소리. 엄마가 울고 있었다. 아빠는 눈물을 삼키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엄마...”
엄마가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등으로, 아주 부드럽게.
가슴 속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구슬이 맑게 울렸다.
‘그래. 우리 손녀. 그것이면 됐다.’
기억나지 않는 무수한 사랑들이 지금의 우리를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