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가는 길

그리움이 남긴 사랑

by 윤사과

딩디디딩딩 딩디디딩— 새벽 여섯 시. 지후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한참 더 자고 있었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빨리 눈이 떠졌다. 겨울방학 첫날, 엄마 없이 떠나는 둘만의 첫 여행이었다.


“지후야, 세수하고 옷 입어라. 아빠 준비 다 했다.”

아빠는 패딩을 이미 다 걸친 채, 지후의 짐을 마지막으로 살피고 있었다.

“우리 지후 베개. 우리 지후 속옷. 우리 지후 양말... 그리고 아! 치약, 칫솔. 깜빡해서 쓸데없는 돈 쓸 뻔했다.”

아빠는 칫솔치약에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짠돌이지만 그 안에는 작은 다정함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다. 아빠가 지후를 바라보자, 지후는 억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였다. 엄마가 떠난 뒤 둘은 억지로라도 웃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둘은 차에 올라타며 엄마가 있을 때부터 해오던 시작 주문을 외쳤다.

“추추출출바알!”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포고문이었다. 행선지는 원주.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미술관이 있는 곳이었다.


부산에서만 지낸 지후와 아빠에게 강원도의 겨울은 낯설고 조금 두려웠다. 둘은 마치 집에 있는 방한 장비를 모조리 꺼내 입기라도 한 듯 두툼하게 차려입었다. 롱패딩, 발열내의, 마스크, 핫팩. 누가 보면 북극 원정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새벽 출발이라 그런지 도로는 조용했고, 덕분에 차는 네 시간 만에 원주에 닿았다.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후가 태어나 처음 보는 ‘진짜’ 눈이었다.

“와아! 아빠, 이거 눈이야? 진짜 눈이야?”

처음엔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던 것이 이내 둥근 눈송이로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후의 엄마는 유년기를 강원도에서 보냈다. 그래서 지후는 눈에 관해서는 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눈의 ‘경력자’였으니까. 강원도의 눈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내려 허리만큼 쌓이는 날도 있고, 치워도 치워도 또 내려 ‘내가 방금 치운 게 맞나’ 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아빠! 우리 눈싸움하자!”

눈이 쌓인 곳이면 어디든 지후는 아빠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졸랐다. 결국 아빠는 세 번이나 차를 멈춰야 했다.

눈밭 위에서 눈덩이가 오고 가는 소리가 통통 튀었다. 엄마라면—아마 살짝 웃으며 “이제 그만. 감기 든다.”라고 말했겠지, 지후는 생각했다. 지후 마음속엔 늘 엄마가 있었지만, 막상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엔 가슴이 선명하게 저릿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기억 위로 미소가 먼저 올라왔다.


드디어 원주 미술관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 공기와 따뜻해 보이는 눈송이가 함께 지후의 얼굴을 덮었다. 입이 떨릴 만큼 추운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지후는 엄마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말수도 적고 표정 변화도 크지 않은, 눈이 살포시 쌓인 새벽 풍경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섬세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입술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모네의 수련이야. 여긴 레플리카전이라 진품은 아닌데... 대신 만져볼 수 있어.”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에 이어졌던 작고 씁쓸한 미소를 보자 지후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엄마, 내가 크면 루브르 박물관 데려갈게. 엄마가 맛있는 초콜릿 사준 보답으로.”

“지후야, 고마워.”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면서 지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지후는 그 순간, 엄마 얼굴에서 자신이 처음 초콜릿을 맛보았을 때 보였을 것만 같은 미소를 다시 보았다. 엄마는 정말 기뻤던 것 같다고, 지후는 생각했다.

미술관 안 카페에는 엄마가 오래 바라보던 복숭아 케이크가 그대로 있었다. 조각당 1만 2천 원. 지금도 그 가격이었다.


그날, 엄마는 복숭아 모양의 케이크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아빠는 짐짓 모른 체하며 지후에게 말했다.

“이게 무려 1만 2천 원짜리 케이크다. 그래도 오늘은 먹자. 1만 2천 원이면 우리 지후 용돈 2주일치인데.”

엄마는 그 말에 어린아이처럼 밝고 해사하게 웃었다.

“여보, 지후 태몽이 복숭아였던 거 기억해?”

그 순간, 아빠의 눈동자 속 엄마는 정말 복숭아처럼 보였다.


미술관에서도 눈은 계속 쌓였다. 벤치도, 조각상도, 산과 바닥에도 눈이 조용히 내려 겹겹이 눈옷을 껴입은 듯했다. 종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눈으로 만든 창작물처럼 보였다.


카페 맞은편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지후가 나란히 앉았던 나무벤치가 보였다.

“지후야, 앉지 마라, 젖었다.”

아빠는 말렸지만, 지후는 아빠가 사진을 찍는 사이 살짝 벤치 가운데에 앉았다. 엉덩이를 떼자 눈 위에 자그마한 자국이 생겼다. 지후는 그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엄마가 여기 앉는다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눈보다 더 가벼워졌을 테니까.

작년만 해도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먼저 났다. 하지만 오늘은 두 번째 미소가 먼저 올라왔다. 그리움을 덮을 만큼의 사랑이 천천히 마음 위에 쌓이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뒤, 아빠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지후는 초콜릿을 먹기 위해 아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찾다 말고 지후는 미술관 입장 티켓을 발견했다.

‘하나, 둘, 셋.’

‘왜 두 장이 아니라 세 장일까.’

지후는 반들하게 코팅된 티켓들을 한참 내려다봤다. 욕실에서 아빠는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지후야, 지후 손 씻고 초콜릿 먹고 있어. 가방에 뒀어. 찾았어?”

지후는 티켓을 다시 넣어두려다 말고, 아직 입장 처리가 되지 않은 세 번째 티켓을 자기 가방 가장 깊은 곳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아빠가 왜 세 장을 샀는지, 자기가 왜 그 티켓을 간직해야 한다고 느꼈는지 지후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어느 구석에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했다.


오늘의 여행에는 눈 위에 자국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누군가가 조용히 따라온 것만 같았다.


지후는―앞으로도 계속 엄마가 자기 곁에서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 사랑의 형태로 남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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