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아이

by 윤사과

나는 매일 새벽 계단을 오른다.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나는 하루를 ‘낭비 없이’ 보내야만 한다고 믿는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내가 제대로 굴러가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계단 오르기는 그런 내 방식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일정한 속도로 올라가면 심박수는 어느 지점에서 ‘존2’와 ‘존4’ 사이를 오가고, 그 리듬이 안정되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정렬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매일 새벽 6시에 계단을 오른다. 35층까지 단숨에, 정해진 리듬대로. 고요한 계단은 나에게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수록 내 몸의 움직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까.


가끔은 예기치 않은 마주침이 생긴다. 속도를 늦추거나 바꾸며 어색한 순간을 피하려 애쓰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찰나 그 층의 주민과 눈이 마주칠 때도 있다. 금세 사라지는 작은 버그 같은 순간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작은 균열 같은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뜻밖의 우정으로 이어질 줄은.


그날 새벽 6시 5분, 사람 기척 하나 없는 엘리베이터는 스르륵 25층까지 올라갔다. 그 이후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단을 오르면서 엘리베이터가 25층을 향해 홀로 올라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곳에 사는 이는 새벽 운동을 하거나 조기 출근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묘하게도 25층에 대한 궁금증은 날마다 조금씩 커져만 갔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25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발바닥의 중심이 어디에 실리는지, 호흡은 '존2'인지 '존4'인지, 가슴을 들어 올렸는지, 내 몸의 감각에 더 깊이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정신을 붙잡고 있으면, 어느새 25층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계단을 오르는 내 몸만 남았다. 


유독 한파가 심했던 어느 6시 5분이었다. 25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소음을 내며 상층부로 올라가고 있었다. 매일 보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속도를 늦추더니 18층에서 그대로 서 버렸다.

‘잠시 멈춘 거겠지. 다시 올라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도 엘리베이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리고 나는 또다시 내 효율을 갉아먹는 의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17층. 엘리베이터는 18층. 두 층 사이 계단참에서 멈춰 서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위층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와, 누군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지후야, 맨발로 나와서 이게 뭐야?”

“아빠, 왜 내가 여기 있어?”

“얼른 들어가자. 우리 아들 발 차갑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 그리고 조용해진 복도. 나는 계단참에서 그대로 한동안 서 있었다. 25층으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의 궤적과, 18층에서 잡아챈 듯한 누군가의 잠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어제의 그 작은 혼란 때문에, 10분이면 끝나는 운동 시간이 15분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내 루틴은 조금씩 뒤로 밀렸고, 출근 시간도 5분 늦어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오늘은 어제의 상황이 다시 재연될 수도 있다는 마음의 대비를 하고 다시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다. 발바닥의 중심을 앞쪽으로, 호흡의 시작은 존2로. 평소처럼 내 효율의 리듬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동안, 평소처럼 내 발바닥의 위치나 호흡의 드나듦, 심장박동이 주는 리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돌발 변수에 대비해, 내 몸의 온 신경이 바짝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16층에 도달할 무렵, 위층에서 정체 모를 인기척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나는 계단참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6시 15분이 되자 더는 참지 못하고 올라서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의 사정이 어떻든,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했다.


그때였다.


“엄마... 엄마야?”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나에게 물어왔다. 잠든 듯한 표정과 흐느적거리는 몸짓을 보니, 몽유병이 아닐까 싶었다. 목소리는 어제 들은 아이와 닮은 것 같았다. 아마 이 아이가 지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나는 아이 집으로 추정되는 곳의 초인종을 누르고 위쪽으로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스마트워치가 갑자기 강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5’ 표시가 번쩍였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갑작스러운 스퍼트에 무릎과 종아리가 후들거렸다. 순식간에 꼭대기층까지 올라갔다.


‘엄마, 엄마?’ 아이의 목소리가 되감기듯 귓속에서 울렸다. 그 소리는 내 어린 시절 새벽 공기까지 함께 불러오는 듯했다. 엄마는 늘 새벽에 집을 나섰고, 나는 엄마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어 눈을 비비며 억지로 깨어나려 애쓰곤 했다. 그렇게 새벽은 오래도록 내게 ‘엄마의 부재’를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무능한 아빠를 대신해서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여러 개의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엄마와 아빠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엄마말로는 아빠는 인물도 좋고, 성품도 좋은 선배였다고 한다. 둘의 연애 소식이 퍼지자 여자 동기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아빠가 이제와 변변한 직업 하나 없는 백수가 될 줄은 엄마는 상상도 못 했겠지. 아빠는 언제나 명분, 체면, 도리 따위 말을 읊었지만 정작 하루 종일 집에서 책과 신문만 정독했다.


엄마가 보험회사에 다니면서부터 집안의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엄마의 얼굴을 볼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같은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빠는 점점 자신의 서재로 숨어들었다. 엄마가 바가지 긁거나 잔소리하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우리 가족을 피해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아빠가 외출한 틈을 타 서재 문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빛바랜 서적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고, 홀아비 냄새와 책의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서 불쾌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아빠가 읽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후루룩 들춰보니 자기극복, 창조, 책임 따위의 말들이 빼곡했고, 어떤 문장들은 빨간 펜으로 수십 번이나 줄이 그어져 종이가 너덜거릴 지경이었다.


“너희는 군중이 아니다. 너희는 창조하는 자들이다.”


일평생 어떤 창조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감명받은 문장이 이것인가. 나는 아빠의 무능함과 허영심에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런 내 속의 비웃음을 아빠가 어쩐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를 피하듯 자신만의 낙원으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항상 모른 척했다. 화를 내지도, 소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에 있는 고장 난 세탁기를 바라보듯 무심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를 보면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건 효율이다. 투입 대비 산출이 없는 건 쳐다도 보지 말아라.”


그건 엄마가 자신의 결혼을 얼마나 뼈저리게 실패로 여겼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잠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랐다. 효율이 곧 생존이라고 믿게 되면서.


그렇게 고생해서 나를 키운 엄마건만 나는 나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게 되면서부터 엄마를 멀리했다. 지척에 엄마의 집이 있음에도 나는 늘 바쁜 척, 할 일이 많은 척하며 의도적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집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결국 1년에 한두 번 얼굴을 비추는 무심한 자녀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는 데 성공했다. 그 집엔 숨 막히는 억압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이 스며 있었기에, 그 공간에 들어서는 공포를 1년에 딱 두 번만 감내하면 된다는 사실에 어쩐지 묘한 안도감까지 느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엄마’라고 한 것이다.


지후와의 마주침으로 이후, 새벽 계단오르기 루틴은 시스템 에러에 가까운 충격을 겪으며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루틴을 쉽게 바꿀 수 있을 리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아니, 어쩌면 약간은 알지도 모를—지후라는 아이 때문에 내 루틴을 깨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로 했다.


6시 5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했다. 1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소리 없는 조용한 상향행을 멈춘 것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18층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때 계단참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어제 얼핏 보았던 지후가 분명했다. 이제는 내 머리가 그 아이를 기억해버린 것이다.


지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이모, 여기 왜 있어요?”

눈시울이 붉은 걸 보니 방금 전까지 울었던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름을 알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이름을 안다는 건 나에게 큰 무게감을 주는 일이었고, 이제 지후는 더 이상 완전한 타인이 아니었다.

“응, 나 계단 오르기 운동하고 있었어.”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지후의 눈가에 물든 빨간색 그을음이 끊임없이 내 관자놀이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1분여 남짓 정도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한 뒤 헤어졌다.


그 뒤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나는 지후와 짧게 이야기하며 잠시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자 지후는 나를 만날 때마다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 며칠 동안 보였던 눈가의 붉은 흔적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면서 내 새벽 루틴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6시에 계단 오르기 시작, 6시 15분 마침. 늘어난 5분은 지후와의 시간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참 시답지 않았다.

“이모, 계단 오를 때 창밖 풍경 보이잖아요. 그거 보면 좋아요?”

“나 이모 아니야, 누나라고 해.”

“알겠어요. 누나. 그럼 좋아요?”

“난 별생각 없어... 그냥... 계절만 느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응.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창문을 통해서 느껴진다는 거야. 요즘은 겨울 초입이라 밖이 더 어둡고 나무들이 앙상하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그동안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질문을 결국 꺼내고야 말았다.

“지후야, 너 몇 살이야?”

“저 9살이에요.”

“근데 왜 맨날 계단에서 이러고 있어?”

지후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몽유병 알아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하며 말했다.

“알고 있지.”

“아마 제가 그 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새벽마다 25층 엘리베이터를 눌렀대요.”

지후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빠 말로는... 아마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 같대요.”

“엄마는 안 계셔?”

“제가 7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렇구나.”

“누나는 엄마 있어요?”

“나는 있지. 그런데... 없는 거랑 같아.”

말해놓고 보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늦게 밀려왔다.

“왜요?”

“그건 네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울 것 같아. 좀 더 크면 알려줄게.”


계절이 바뀌고 봄이 왔다. 나의 계단 오르기 루틴은 계속되었고 지후와의 대화도 멈추지 않았다. 날씨에 맞춰 그동안 입었던 약간은 두터운 트레이닝복을 얇고 화사한 색으로 바꿨다. 나도 모르게 지후에게 자랑해야겠다는 생각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18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지후의 이름을 불렀다.

“지후야.”

잠깐의 침묵이 계단참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 낯선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깨뜨렸다.

“안녕하세요.”

지후는 없고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인사를 했다. 나는 당황해 꾸벅 목례를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후 아빠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지후는... 괜찮은 거죠?”

“지후는 아주 잘 있어요. 사실은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선생님이라니. 호칭이 어색했지만 그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지후 아빠는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마치 여기 서 있는 이유를 미리 해명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애 엄마가 죽고 난 뒤부터... 아이가 새벽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더라고요. 아마... 엄마가 그리웠던 거겠죠. 25층. 매일 계단 오르셨으니까 보셨지요?”

“네, 근데 왜 25층인가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 침묵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걸 알아차린 듯,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애 엄마가 살아있던 시절에 저희가 함께 지낸 아파트가 25층이었어요. 그때가 지후나 저나 가장 행복했던 때였지요.”

나는 이제야 25층의 의미를 이해했고, 갑자기 지후가 보고 싶어졌다.

“아이가 처음으로 새벽에 깨지 않고 자네요. 몇 달 만입니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지후에게는 별일이 없었다. 오히려 지후는 비로소 9살의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주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로 지후는 더 이상 계단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루틴은 몇 달 전으로 돌아갔다. 계단 오르기 6시 시작, 6시 10분 마침. 몸의 감각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지후의 얼굴이 온몸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몇 달 동안 나는 지후를... 내 바운더리 안으로 들여버린 걸까. 나를 늘 무심하고 차갑다고 말하던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렇게 다감한 사람이었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우스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는 서서히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후는 이제 내 루틴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17층과 18층의 계단참에 있는 지후의 자전거 바퀴 아래 하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누나, 나 이제 잠이 와서 새벽에 누나랑 놀지 못할 것 같아. 누나 창밖 풍경은 달라졌어?”

지후의 삐뚤빼뚤하고 성긴 글씨체가 귀엽게 나불거리는 듯했다. 나는 쪽지를 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 답장을 썼다.


다음 날 새벽 6시, 나는 쪽지를 들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딱지 접기 하듯 정성스럽게 접어 지후의 자전거 바퀴 아래에 괴어두었다. 그런데 또 다른 쪽지가 하나 더 보였다.

“누나, 어제는 친구들이랑 처음으로 떡볶이를 사 먹었어. 애들끼리 먹는 건 처음이었는데 어른 된 기분이더라.”

9살 주제에 떡볶이로 어른 흉내라니 귀엽고 우스웠다. 얼른 답장을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 발걸음이 다시금 가벼워졌다. 그날 내 심장은 '존2'도, '존3'도, '존4'도 아닌 설렘이 만들어내는 박동을 따르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와 같이 비밀다이어리를 만들어서 공유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숨길 만한 비밀은 하나도 없었지만, 누군가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했던 것 같다. 지후와 쪽지를 주고받는 동안 그때의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 나 이사 가. 내일 새벽에 계단에서 봐.”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지후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새벽마다 계단을 오르며 ‘지금쯤은 푹 자고 있겠지’ 하고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런 지후가 아예 나와 다른 공간으로 가버린다니. 서운함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온몸을 휘저었다.


마지막 만남만큼은 새로운 옷을 입고 갈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지후와 나의 우정은 계단에서 시작되어 계단에서 끝날 예정이다. 그 질서를 지키고 싶어 나는 늘 그랬듯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18층으로 올랐다.

6시 5분. 오랜만에 본 지후의 얼굴은 볼이 올라 동그래져 있었고, 밝은 기운이 환하게 퍼져 있었다.

“누나아!”

“지후야...”

지후는 나를 덥석 안았다. 나도 지후를 꼬옥 안아줬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누나, 아빠가 전세... 어쩌고 하시더니. 이사를 꼭 가야 한대. 가기 싫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지후야, 어쩔 수 없지. 멀리 가는 거야?”

“그건 아니야.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여기서 10분 걸어서 갈 수 있는 아파트로 간대.”

“다행이다. 지후야.”

“누나는 옷이 바뀌었네. 맨날 보던 검은색이 아니잖아.”

“응, 봄이잖아. 바깥 풍경이 바뀐 만큼 나도 바뀌었지.”

“누나 이게 훨씬 이쁘다.”

지후는 진심을 증명하려는 듯 엄지를 번쩍 들어 보였다. 초등학생으로서는 최고의 극찬이었다.

“누나, 나 궁금한 게 있어. 왜 ‘엄마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후야, 우리 엄마는 엄청 고생하면서 혼자서 나를 키웠어.”

지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나, 그럼 오히려 엄마를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살짝 뜸을 들인 뒤 계단 바닥의 매끈한 표면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엄마의 처절함과 그늘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너 내 마음 알겠어?”

“누나, ‘죄책감’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누나 슬퍼 보여서... 그냥 더 안 물을래.”

“고마워.”

그 뒤로 우리는 한동안 시답지 않은, 그러나 우리만의 대화를 이어 갔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새벽 루틴은 완전히 깨져 있었다. 계단 오르기 대신 지후와의 시간을 택한 건— 내 기준에서는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비효율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나는 계단을 오른다.


지후는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살아 있고 내 루틴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지후의 자전거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작은 돌에 괴어 놓은 쪽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쪽지를 찬찬히 펼쳐 읽었다. 아주 작은 글씨나 여백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쪽지의 문장을 천천히 입 안에서 녹이듯 읽었다.


“누나, 누나의 죄책감은 엄마를 사랑해서 그런 것 같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죄책감이 스르르 힘을 놓았다.

아침 7시 나는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저녁에... 밥 좀 먹여줄 수 있어요?”




아이가 가져다준 작은 균열이 닫혀 있던 마음에 온기를 불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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