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

여름의 온도차

by 윤사과

여름이 오면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샤워하고 캡모자, 선글라스에 리넨 원피스를 입어도, 바람은 금세 눅눅해지고 옷자락은 살에 달라붙는다. 공들여 한 화장은 땀방울에 녹아내리고, 픽서를 쓴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게다가 세상 떠나가듯 울어대는 매미소리.


그나마 여름의 유일한 구원자였던 에어컨마저 고장 나버렸다. AS센터에 전화를 걸자 접수가 폭주했다며 이틀 뒤에야 방문이 가능하단다.


“엄마, 나 너무 더워. 더워서 치킨 될 것 같아.”

여덟 살짜리 딸 시윤이가 옆에서 징징거리고, 남편은 에어컨이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다. 마치 이 무더위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시윤아, 엄마는 이미 치킨이야. 치킨 냄새나지 않아? 오늘 저녁은 치킨 먹자.”

“치킨? 오케이. 좀 참아볼게.”

“엄마는 진짜 여름 싫어. 시윤이는 좋아?”

“난 너무 좋은데? 바다도 가고 워터파크도 가고, 학교도 안 가잖아! 근데 엄마는 왜 여름이 싫어?”

“지난번에 말했잖아. 몸이 딱풀처럼 달라붙는 거, 매미소리... 그리고 또...”


말을 잇다 멈췄다. 그 여름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 더웠던 여름, 모든 게 시작된 그곳. 삿포로.


십 년 전, 나는 지금과 꼭 닮은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갑작스러운 이별, 확정된 승진이 마지막 순간에 뒤집힌 일.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던 시기였다. 사랑도, 일도, 나 자신도 버거웠다. 그저 멀리, 이 더위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시원한 이름의 도시를 골랐다.

삿포로.


삿포로의 공기는 예상과 달리 뜨겁고 끈적했다. 겨울에 눈이 펑펑 내리는 삿포로만 믿고 한여름 서늘한 바람을 기대하다니. 7월 말, 8월 초는 삿포로조차 더운 시기란 걸 왜 몰랐을까. 한국의 폭염을 피해 도망쳤는데 결국 더위 속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그래도 어렵게 낸 휴가를 호텔 안에서만 보낼 순 없었다. 그 유명한 라벤더 축제는 꼭 가야 했다. 렌터카를 빌려 후라노의 팜 도미타로 향했다. 목적은 단 하나, 라벤더 아이스크림.


두 시간쯤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멈춰버렸다. 대책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도로 위에서,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딘가에 사람은 있겠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라벤더 농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공기는 뜨겁고 습해서 숨이 가빴다.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들러붙는 기분. 땀은 옷을 타고 흘러내렸고, 속눈썹에까지 맺혀 눈이 따끔거렸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무도 모르겠지?’ 고개를 숙인 채 걷던 그때, 시야 한가운데 투명한 물병 하나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신기루인가.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물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머릿속이 서늘하게 맑아졌다. 그제야,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끝에 물병의 주인이 서있었다. 젖은 셔츠, 이국적인 이목구비. 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Are you okay?” (괜찮아요?)

“Ah... yes. I’m sorry. I didn’t see you. I only saw... your water.” (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목이 말라서 당신을 못 봤어요. 물만 보이더라고요.)

말을 마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好奇怪啊。有趣的女人。” (이상하네. 재밌는 여자군.)

중국어다. 반사적으로 입이 먼저 반응했다.

“是的。我是有趣的女人。对不起,我请你吃晚饭吧。” (맞아요. 저는 재밌는 여자고요, 미안하니까 저녁 사드릴게요.)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말했다.

“你会说中文?” (중국어 할 줄 알아요?)

“我在中国学了一年中文。” (저 중국어 1년 동안 중국에서 배웠어요.)


그는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서투른 중국어와 부족한 영어가 뒤섞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어설픔이 오히려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의 이름은 장웨이였다.


그와 나눈 대화는 말보다 눈빛이 먼저 통했고,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전의 대화들은 늘 세잎클로버들 사이에서 네잎을 찾듯, 어쩌면 특별한 감정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네잎클로버는 이미 내 손 안에 있었다.


“엄마, 무슨 생각해?”

딸아이의 목소리가 현실로 나를 끌어당겼다.

“아니야.”

“你们俩在聊什么?” (둘이 무슨 이야기해?)

남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보, 집에서는 되도록 한국어 쓰자니까.”

“미안. 근데 너희 무슨 얘기했어?”

“에어컨도 안 되는데 잘만 자더라. 이런 거 고치는 건 다 내 일이야?”

“맞아! 아빠는 맨날 잠만 자고, 얼굴 잘생긴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시윤아, 맞는 말이지만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나는 조용히 딸을 타일렀다.

“女儿,这就是妈妈讨厌夏天的理由。” (딸아, 이게 바로 엄마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야.)

“엄마, 또 중국어야? 나 못 알아듣게 또 그러는 거잖아. 뭘 싫다는 건데?”

“아냐, 그냥... 여름이 싫다는 거야.”

“엄마는 진짜 여름 싫어하네.”


나는 딸아이의 뺨을 쓰다듬는다. 딸의 피부는 젖은 풀잎처럼 촉촉하고 부드럽다. 베란다 밖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 거세진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묻힐 만큼.


그래서 나는 여름이 싫다. 하지만 여름이 오면, 나는 또 그 여름으로 돌아간다.




사랑은 때로, 온도의 형태로 남는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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